15세기 말 이래 유럽인들은 다른 세계를 찾아서 대양을 가로질러 탐험을 떠나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탐험 연대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 원정대의 규모는 비교적 작은 편이었다. 15세기 말 유럽인의 탐험대와 같은 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명나라 정화(鄭和)의 원정을 비교해 보자. 정화는 2만 이상의 수군과 수백 척의 군함, 상선을 거느리고 원정 길에 올랐다. 그들의 군함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배수량 수천 톤에 이르렀던 반면, 바스코 다 가마의 기함은 150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럽의 대양 탐험이 경제권의 확대로 곧장 연결된 까닭은 무엇인가? 임마누엘 월러스타인은 유럽이 직면한 ‘절박한’ 상황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정화의 원정이 중국 경제권의 확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절박함이 덜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내부 식민지를 확장할 여지가 있었지만, 유럽은 한계지마저 고갈된 상태였다. 외부로 진출하는 길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다.
유럽인의 대양 진출은 여러 요인이 작용한 복합적인 결과였다. 우선 오스만 제국의 강세로 기존의 지중해 무역이 침체를 거듭했을 때 무역 상인들의 이윤 추구욕이 새로운 항로를 통해 동방 무역의 활력을 되찾고자 하는 개척 노력과 맞아떨어진 것이었고, 이를 가능케 하는 데는 새로운 지식과 항해술과 무장상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왕실의 탐험 후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또 이탈리아 상인들의 상거래 지식(예를 들어 개항장, 회사 조직, 신용거래 방식 등)이나 북이탈리아 및 남독일 은행들의 자본 투자, 심지어는 기독교 전파를 목적으로 한 선교 운동까지도 새로운 국제무역의 발전에 기여한 셈이었다.
유럽인의 대양 진출은 여러 요인이 작용한 복합적인 결과였다. 우선 오스만 제국의 강세로 기존의 지중해 무역이 침체를 거듭했을 때 무역 상인들의 이윤 추구욕이 새로운 항로를 통해 동방 무역의 활력을 되찾고자 하는 개척 노력과 맞아떨어진 것이었고, 이를 가능케 하는 데는 새로운 지식과 항해술과 무장상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왕실의 탐험 후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또 이탈리아 상인들의 상거래 지식(예를 들어 개항장, 회사 조직, 신용거래 방식 등)이나 북이탈리아 및 남독일 은행들의 자본 투자, 심지어는 기독교 전파를 목적으로 한 선교 운동까지도 새로운 국제무역의 발전에 기여한 셈이었다.
(서양사 강의,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