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23일 일요일

대발견 시대와 선박의 크기, 그리고 해상 사업

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15세기 이후에 조선 기술이 눈에 띄게 진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배의 크기가 당장 커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소위 '대발견(The Great Discovery)' 시대 선박들의 특징은 오히려 크기가 작다는 데에 있었다. 원래 해외 탐험은 위험이 큰 사업이어서 처음부터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사용되는 선박 역시 소규모였다. 그러나 자본 부족으로 작은 배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점 외에 오히려 작은 배가 유리했다는 점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낯선 해안에 상륙해야 하는 배들은 너무 크면 해안에 좌초할 우려가 있어서 오히려 불리했다. ... '대발견'은 소도시의 소수 사람들의 사업이며, 공장이라기보다는 장인들의 공방 수준에서 이루어진 기술 발전에 힘입어 이루어진 것이다. ...

그러나 '발견'과 '탐험'의 시대가 지나가고 '정복'과 '교역'의 시대로 접어들자 상황이 바뀌었다. 낯선 바다와 낯선 대륙을 탐험하는 데에는 오히려 작은 배가 유리할지 몰라도 어느 정도 안정 단계에 이르면 큰 배를 이용한 상업이 유리하게 된다. ...

근대 초에 유럽의 배들이 규모가 커지고 디자인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 배들은 실로 가소로운 수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배들은 오늘날 한강 유람선(약 280톤 급)만 한 배들이었다. 근대 초 유럽의 원양 항해는 비유하자면 한강 유람선을 타고 인천을 떠나 인도양과 희망봉을 거쳐 유럽까지 항해하고 돌아오는 행위에 해당한다. 유럽의 해양 탐사를 설명하면서 '진취적인 용기' 운운하는 것은 순전히 레토릭만은 아닌 것이다. ...

근대 초의 해양 항해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이루어진 위험에 찬 사업이었다. ... 그러나 처음에 소자본을 가지고 시작한 '벤처 기업'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확장되었다. 초기의 위험 요소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수익 가능성이 확인되자 지금까지 사업의 전망을 주시하던 대자본과 정부도 간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변방 국가만이 아니라 중심 국가들도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선박도 커지고 항해의 전체 규모도 폭발적으로 커졌다. 여전히 위험성은 컸지만 그것을 내부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체제가 형성되어 갔다.

(대항해시대, pp.136-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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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0일 목요일

한국전쟁과 中蘇분쟁

트루만 대통령과는 달리 애틀리 수상은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공산주의자인 점은 틀림없지만 스탈린주의자는 아니라고 믿었다. 애틀리와 베빈 등 노동당 지도자들은 또한 중국 공산주의에서 강한 민족주의와 외국의 영향에 대한 강한 반발의 전통을 감지하였다. 따라서 중국정부를 모스크바에 의해 조종되는 허수아비 정권으로 차치해 버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서방의 정책은 이 두 공산세력의 분열을 추구하여야 하며, 中蘇간의 분쟁의 여지는 이미 한국전쟁을 시작함으로써 소련은, 대만을 무력으로라도 통일하고자 하는 중국의 열망을 좌절시켰다는 것이다.

(박지향, 「영국노동당과 한국전쟁」, 『역사학보』, 1994,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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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4일 금요일

'Global History'에 대한 여러 번역 용어들

  • 차하순, 강선주, 정선영: '세계사', '새로운 세계사'
  • 김원수: '지구 규모의 역사', '글로벌 역사', '글로벌히스토리'
  • 조지형: '지구사'
  • 배한극: '글로벌히스토리'
  • 이영효: '글로벌 역사', '전지구적 역사'
▶ 배한극의 견해: '세계사'는 종전의 세계사와 구별되지 않고, '지구사'는 지구과학에서 논하는 지구사와 혼동되기 쉽다.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 pp.355-356)

2010년 5월 13일 목요일

프랑스 혁명과 유대인 해방

보통 프랑스 혁명기의 유대인 해방은 프랑스 혁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이 프랑스 혁명에게 억압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이라는 보편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좀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1791년 9월 27일에 프랑스 국민의회는 프랑스 내의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주기로 의결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법적 평등을 보장해 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혁명가들은 당연히 이를 혁명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쾌거로 환영했다. 많은 유대인들도 이것이 수 세기에 걸친 굴욕과 법적 차별, 주류 사회로부터의 배제를 끝내 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

그래서 겉으로만 보면 이것은 인간 해방이라는 점에서 시대사적인 의미를 갖는 전환점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해방이 아니라 큰 희생을 요구하는 거래였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시민권을 부여받기 위해 유대인 공동체의 자율성을 허용하는, 과거에 프랑스 왕으로부터 받은 특권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 민사적인 일에 대해 유대교 성직자인 랍비가 가진 관할권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프랑스인이 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자격으로서였다.

혁명가들이 유대인들에게 이런 요구를 한 것은 그들의 종교적 공동체를 제거함으로써 프랑스 문화에 쉽게 동화시키기 위해서였다. ... 그리하여 일부 유대인들이 개인적으로 프랑스 사회에 편입되는 대신 유대인의 종교 공동체는 공식적으로 부인되었다. ...

결국 혁명기의 공화국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명분으로 유대인에게 형식적인 법적 평등을 주는 대신 그들의 공동체를 부인함으로써 그 종교생활의 파괴를 기도한 것이다. 동화를 하지 않는 한 그들이 진정한 프랑스 국민이 될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3공화정 하에서 창궐한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는 혁명기 프랑스인의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오늘날 이슬람 이민자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태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 공공생활에서 이슬람교적 행위를 금지하려는 것이다.

(「한국에서 서양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 pp.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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