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9일 금요일

고려高麗의 사원寺院과 촌락村落

... 신라말 경주는 민가와 사원이 뒤섞여 있다고 지적되고 비판받았다. 그러한 일을 막기 위해 고려에서는 '사가위사捨家爲寺'를 철저히 금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민가와 사원이 뒤섞여 있는 일은 흔치 않았다. ... 깊은 산속 골짜기에 자리한 사원도 많았는데 이 경우에는 수행이 중요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중요 교통로에 자리하는 수도 많았다. ... 여행자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우마에게 꼴을 주기도 하였다. ... 고려 시기에 사하촌寺下村은 발달하지 않은 듯하다.

사원을 짓는 데는 엄청난 재력과 인력이 필요했다. 그러한 재력‧인력을 사원이 마련하는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세속 사회에서 제공받았다.

사원은 토지 경영이나 고리대‧상업 등 각종 경제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경제 활동을 통해 사원과 세속 사회는 깊은 유대 관계를 맺었다. 사원 토지는 보통 흩어져 있었다. 세속인의 토지와 섞여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사원 토지를 경작하는 민인은 특정 촌락에 사는 민인이 망라된 것은 아니었다. 민인은 자기 토지를 소유하고 사원 토지를 경작하기도 하고, 남의 토지를 소작하고 사원 토지를 경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원 토지가 장생표를 세우는 방식으로 특정 권역을 이루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이때는 권역 내에 사는 민인 모두가 사원의 지배를 받은 듯하다.

사원은 세속 사회와 관계를 맺고서 유지 운영되었다. ... 그렇지만 사원이 특정 촌락과 배타적‧독점적 결합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서구의 교구식으로 사원을 운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깊은 이야기 3, pp.198-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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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 노비奴婢와 양수척楊水尺

사노비私奴婢는 특정 개인이 소유한 노비다. 사노비는 주인의 사유 재산으로 물건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 노비는 이름만 있었을 뿐 성姓이 없었으며, 국가에 대한 공역公役 의무도 지지 않았다.

사노비는 일반 양인이 경제적인 이유로 몸을 팔아 생겨나는 경우가 많았다. 불법으로 강제로 종을 삼아 사노비가 생기는 수도 많았다. 일단 노비가 되면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신분 세습과 관련해 통상 적용되는 원칙은 '일천즉천一賤則賤'이었다. ... 노비에 대한 소유권은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어머니 소유주에 귀속하였는데, 어머니가 양인이면 아버지의 소유주에 귀속되었을 것이다.

주인이 노비에게 가하는 매질 따위의 가해 행위는 불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죄의 유무를 불문하고 주인이 죽이는 것은 불법이었다. ...

반면 사노비는 주인에 대해 절대 복종해야 했다. ... 주인의 범죄도 고발할 수 없었다. 예외적으로 반역 같은 중대한 범죄는 고발해야 했다. ...

공노비公奴婢는 국가 기관에 속한 노비다. 공노비는 전쟁 포로에서 비롯되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반역‧적진 투항‧이적 같은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 관에서 당사자나 가족을 잡아들여 생겨났다. 귀족층 가운데 이런 이유로 공노비가 되는 수도 있었다.

공노비는 값이 정해지지도 않았고 매매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 공노비는 누구나 독자적인 가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 재산을 소유하여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도 인정하였다. 이 점에서 공노비는 사노비에 비해 신분상 지위가 높았다고 할 수 있다. ...

사원노비寺院奴婢는 다양하게 생겨났다. 국가가 공노비를 지급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개인이 소유한 사노비를 시납施納하는 수도 있었다. 때로는 사원이 국가의 양민을 노비로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사원노비는 공노비도 아니고 사노비도 아닌 것으로 분류되었다. 사원노비가 사원에 대해 지는 부담은 공노비나 사노비보다 가벼웠다. ...

고려 시기에는 유기를 만들어 팔고, 도살업屠殺業에 종사하며, 광대(창우娼優) 일을 하는 특수한 층으로 양수척楊水尺이 있었다. 양수척이 후백제의 후손이라고 설명하는 자료도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양수척은 여진족이나 거란족의 후손인 듯하며 고려 초부터 있었다.

양수척은 정처 없이 이동하였으며 관적貫籍도 없었다. 따라서 부역이 부과되지 않았다. 이는 고려 국가가 이들을 국민 외의 존재로 봤음을 뜻한다. 그러나 남에게 소유되어 팔리지 않았으며, 이 점에 노비와 뚜렷이 구별되었다.

사회적으로 천대받았던 이들은 적이 쳐들어왔을 때 향도 구실을 하기도 했고,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왜구로 가장해 피해를 입힌 경우도 있었다. 양수척은 뒷날 백정白丁(도살업자)의 효시가 되었다.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3, pp.184-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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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7일 수요일

근대의 폭력성과 유럽

'근대화된' 유럽의 폭력은 분명 성격이 달랐다. 그들이 멀리 해외로 나아갔을 때에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무의미한 폭력을 행사항 이유도 없을 뿐 아니라, 또 실제로 그들이 해당 지역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에서 역설적으로 유럽 세력은 자신들의 무력을 최대한 유효하게 집중하여 사용해야 했다. 그들의 원하는 이익을 얻기 위해 필요한 지점에 그들이 가진 무력을 최대한으로 쏟아 붓는 이런 '합리적인 폭력'이 실제로는 더 가공할 결과를 가져왔다.

총포와 화약이 유럽의 승리의 기반이 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럽의 승리를 너무 단순하게 총포의 승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오토만 제국, 중동 지역, 인도, 중국, 한국과 일본 모두 조만간 총포를 수용했으며 유럽만이 총포를 독점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총포의 유무가 아니라 그것을 어느 편이 더 유효적절하게 사용했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 많은 학자들은 근대 유럽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데에는 폭력 면에서 앞섰기 때문이며, 또 결국 유럽이 전 세계에 팔아먹은 것은 폭력이었다고 주장한다.

(대항해시대, pp.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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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십자군

위대한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 1198-1216)가 발진시킨 제4차 십자군은 십자군이란 이름조차 무색케 하는 결과로 끝났다. 1204년 이노센트는 군대를 모아 베네치아의 함대에 태우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인들은 성지의 회복보다는 그들 자신의 상업적 이익에 훨씬 더 관심이 컸다. ... 그들은 이윤이 많이 남는 콘스탄티노플과의 교역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완전히 독점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1204년의 십자군은 그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베네치아인들은 십자군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교황의 원래 계획에 따라 성지로 향하는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게 하였다. ... 십자군의 공격으로 옛 비잔틴 제국은 완전히 분해되어 버렸다. 그에 대신하여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제국(Latin Empire of Constantinople)이 들어섰고, 플랑더즈伯 볼드윈(Baldwin)이 황제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단지 수도와 아드리아노플, 그리고 그 두 도시 사이의 지역과 소아시아의 가까운 해안지대에 대해서만 직접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십자군 제후들은 각기 테살로니카(Thessalonica) 왕국, 아테네 공국, 아케아(Achaea) 공국 그리고 그 밖의 여러 나라를 세워 그 지배자가 되었다. 이들 나라는 원칙상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봉토였으나, 실질상으로는 독립된 나라였다. ...

콘스탄티노플에 최후의 공격을 감행할 때까지 이노센트 3세는 십자군이 성지에 가지 않고 딴 짓을 하는 것에 대해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이 막상 벌어지자 그는 라틴 제국의 설립을 하나님의 놀라우신 役事로 환영하였다. 그는 뒤늦게 정복 뒤의 야만스러운 약탈 행위를 전해 듣고 깜짝 놀랐으나, 곧 이미 이루어진 사실과 타협하였다. 어쨌든 라틴 기독교 세계가 또 하나의 영역을 차지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서양중세사, pp.265-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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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사학의 특징

(한국) 전통사학의 특징을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교훈으로서의 역사다. 역사란 군신의 업적을 기록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후세에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다. 역사는 '정치의 거울'로서 과거 사실의 시시비비를 가려 역사 속에서 규범을 찾는 도덕주의가 본질이었다. ... 따라서 역사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을 원칙으로 했고 사실의 정확한 기록은 사관의 임무였다. 또한 군주, 명신, 장졸, 학자 등은 물론 반역, 혹리, 간신 등의 실상을 기록함으로써 포폄에 도움이 되게 했고, 기전체에서 열전의 비중을 크게 하여 인물의 공과功過를 강조했다.

둘째, 경학으로서의 역사다. 한국 전통사학은 과거 경험을 중시하는 복고적이며 상고적인 가치체계에 기반한다. ... 즉 경학으로서의 역사는 독립된 학문이 아니라 유교의 일부로서 군주의 정치철학을 제공하는 정치의 바탕이 되었다. 역사 내용은 유교 경전의 정신이나 내용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어 경전이 곧 역사였다. 이와 같은 경사일치의 전통사학은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정치철학으로서 통치자의 정치수단이기 때문에 국가와 왕실 중심의 서술 형태를 취했다.

셋째, 자아의식으로서의 역사다. 전통사학은 중국 중심의 역사인식 체계를 갖고 있다 해도 주체적인 자아의식과 국가의식을 담고 있었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화이론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다. ... 기본적인 체제, 서술 방법, 인물 평가 등에서는 중국의 원칙을 따랐으나, 독자적인 연호와 월력을 사용했으며 이른바 삼한정통론을 주장하여 주체적 역사인식을 발전시켰다. ...

(역사교육의 이론, pp.10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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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2일 금요일

영국 동인도회사와 면직물

여러 이유에서 중요성을 더해 간 것은 면직물이었다. 면직물은 아시아 내의 가장 중요한 공산품이었는데, 이것이 뒤늦게 유럽에 소개된 것이다. 순면 제품은 이전에 레반트 교역이나 포르투갈의 사업에서도 거의 없던 것이며, EIC(영국 동인도회사, East India Company)가 1623년에 처음 시도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 그런데 1660년대에 들어서자 면직물 판매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상승을 기록했다. ... 인도의 면직물은 기술과 사업 조직의 변화 없이도 더 많은 인력 투입으로 공급 증가가 가능했고, 다른 한편 유럽에서는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당장은 이 직물을 자체 생산하지 못했다. 그러니 인도 직물 수입이 그토록 급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목면은 유럽인들의 "외피(外皮)를 홀랑 바꾸어 버린" 중요한 품목이었다. 그 이전에 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모직물이 중요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마와 대마, 혹은 이런 것들을 혼합해서 짠 직물들을 사용했다. ... 처음 목면이 유럽에 들어오자 '충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대 열풍을 일으켰다. 인도에서 짠 캘리코는 값이 싼데다가 품질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 처음에는 면직 옷을 입고 다니면 식탁보를 입고 다닌다는 놀림을 당했으나, 곧 사람들은 이 멋진 아시아 직물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소위 '캘리코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많은 양의 캘리코가 수입되자 모직물, 견직물, 특히 리넨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일자리를 빼앗길 위험에 빠진 직공들의 저항이 거세게 터져 나왔다. ... 각국에서 자국 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조치들이 강구되었다. ... 그렇지만 대세를 법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역사의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이런 위기가 결국에는 산업혁명을 초래해서 영국의 면직물이 인도에까지 수출되고 급기야는 인도 면직물업이 심대한 타격을 입고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대항해시대, pp.1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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