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말 경주는 민가와 사원이 뒤섞여 있다고 지적되고 비판받았다. 그러한 일을 막기 위해 고려에서는 '사가위사捨家爲寺'를 철저히 금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민가와 사원이 뒤섞여 있는 일은 흔치 않았다. ... 깊은 산속 골짜기에 자리한 사원도 많았는데 이 경우에는 수행이 중요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중요 교통로에 자리하는 수도 많았다. ... 여행자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우마에게 꼴을 주기도 하였다. ... 고려 시기에 사하촌寺下村은 발달하지 않은 듯하다.
사원을 짓는 데는 엄청난 재력과 인력이 필요했다. 그러한 재력‧인력을 사원이 마련하는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세속 사회에서 제공받았다.
사원은 토지 경영이나 고리대‧상업 등 각종 경제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경제 활동을 통해 사원과 세속 사회는 깊은 유대 관계를 맺었다. 사원 토지는 보통 흩어져 있었다. 세속인의 토지와 섞여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사원 토지를 경작하는 민인은 특정 촌락에 사는 민인이 망라된 것은 아니었다. 민인은 자기 토지를 소유하고 사원 토지를 경작하기도 하고, 남의 토지를 소작하고 사원 토지를 경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원 토지가 장생표를 세우는 방식으로 특정 권역을 이루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이때는 권역 내에 사는 민인 모두가 사원의 지배를 받은 듯하다.
사원은 세속 사회와 관계를 맺고서 유지 운영되었다. ... 그렇지만 사원이 특정 촌락과 배타적‧독점적 결합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서구의 교구식으로 사원을 운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깊은 이야기 3, pp.198-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