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30일 화요일

서임권 투쟁의 결과

20여 년에 걸친 투쟁 끝에, 교황과 황제의 양 진영에서 온건한 사람들이 진지하게 타협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기본적인 관심은 세속적인 지배자가 성직을 부여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 왕들의 기본적인 관심은 세속적인 지배권을 겸비하게 될 주교들로 하여금 그들의 세속권이 왕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케 하는 데 있었다. ... 1107년에 캔터베리의 성 안젤름과 헨리 1세(Herry I)는 영국에서의 타협안을 마련하였고, 이는 뒤이어 교황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에 따르면 주교는 우선 교회법에 따라 선출된 다음, 봉신으로서 왕에게 臣誓를 하고 왕으로부터 봉토와 직책에 따른 세속 사법권을 받고 나서야 주교로 축성되도록 되어 있었다. ...

서임권 투쟁을 종결시킨 이른바 보름스 화의(the Concordat of Worms)라 불리는 타협은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 2세(Calixtus II; 1119-1124) 사이에서 1122년에 이루어졌다. 그 타협안은 독일의 경우 왕이 주교를 선출하는 자리에 참석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영국에서의 타협안과 비슷했다.

왕들은 ... 실제로는 여전히 주교를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나치게 부적격한 인물을 성직에 임명하기는 훨씬 더 어려워졌다. ... 분명히 12세기에는 성직 임명의 기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서임권 투쟁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왕의 神政政治가 서구 세계의 통상적인 정치형태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저지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써 교황의 神政政治가 대두한 것은 아니었다. 교황이 왕을 폐위할 수 있다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주장은 왕들에게 전혀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기껏해야 매우 논쟁의 여지가 많은 주장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 투쟁의 결과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권력을 남용한 통치자에 대한 저항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론이 태동하였다는 것이었다. ...

독일 전역에서 제후들은 (왕권에 맞서) 그들의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 봉건제가 독일 전역에 확산되었다. ...

교황은 투쟁을 통해 권위를 크게 높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정치적 요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종교적 문제에 관한 한 기독교 세계의 최고 지배자로서의 교황의 지위는 강력하게 재천명되어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

(서양중세사, pp.234-237)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중세 대학의 출현

오늘날의 대학—정규 연구과정을 제공하고 학위를 수여하는, 교수와 학생의 공동체—은 12세기 말‧13세기 초에 기원하였다. 대학을 뜻하는 universitas는 기본적으로 "모두"라는 집합적 의미를 지녔으며 ... 대학은 본질적으로 교육 길드였다. 북유럽에서는 대학이 선생들의 길드였고, 반면에 이탈리아와 남유럽에서는 학생들의 길드였다.

... 12세기 말에 볼로냐 대학에는 적어도 4개의 과정—수사학, 로마법, 교회법, 그리고 의학—이 개설되어 있었다.

볼로냐 대학의 명성에 이끌려 서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볼로냐로 몰려들었다. ... 이들 학생 길드(nation이라고 불리었다)는 각각 학생장(rector)을 선출하여 길드를 대표케 하였다. 곧 여러 다른 분야를 가르치는 교수들도 독자적인 길드를 형성하였으나, 학위수여 요건에 관한 것을 제외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학생 길드가 주도권을 쥐었다. ...

빠리 대학은 노트르 담(Notre Dame) 성당학교의 명성에 이끌려 빠리로 모여든 교수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 12세기 말에, 빠리에서 가르치고 있던 교수들은 조합, 즉 대학(university)을 형성하였다. 1200년에 존엄왕 필립 2세가 빠리의 교수 및 학생들에게 특권을 부여한 특허장에는 이 교수조합이 언급되어 있었고, ... 총장은 원칙상 교양학부의 우두머리에 불과하였으나, 교양학부가 가장 컸으므로 대학의 최고 관리임을 주장하였고, 신학부의 학장과 오래도록 격렬한 투쟁을 거쳐 결국 그렇게 인정되었다.

영국에서 옥스포드시는 지리적으로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고, 12세기 초반에는 이따금 빠리와 심지어 볼로냐로부터도 교수들이 흘러들어와 그곳에서 강의하곤 하였다. ... 캠브리지 대학의 기원은 지극히 모호하지만, 옥스포드와 빠리에서 옮겨온 교수와 학생들에 의해 창설된 것임은 분명하다. ...

... 각 대학은 聖‧俗의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오랜 투쟁을 감행하였다. 모든 교수와 학생이 사제처럼 삭발하고 교단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원칙상 세속 정부에 의한 체포와 처벌에서 면제되었다. 그러나, 대학의 우두머리들은 사실상 광범위한 세속적 권한을 획득하였다. ...

... 일단 입학한 학생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의 세 과목을 배우기 시작했다. 빠리에서는 문법책 2권과 논리학책 5권을 강독받으면, 문학사(bechelor of arts)가 되었다. 문학사는 일종의 도제 교사가 되어 문학사가 되려는 학생을 가르칠 수 있었다. 5~6년 동안 그러한 일을 하면 문학碩士가 되었다. ...

문학석사가 된 학생은 대학을 떠나든지, 교양과목을 가르치든지, 아니면 법학, 의학, 또는 신학의 학위를 받기 위해 기나긴 수업과정에 들어가든지 선택할 수 있었다. ... 가장 존중받던 교과정은 神學이었고, 그 박사학위를 따는 것은 진짜 어려운 일이었다. ...

13세기 후반에는, ... 이들 자선가들은 가난한 학생을 무료로 또는 아주 싼 값으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기숙사를 설립하였다. ... 그리하여 세 대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칼리지(college)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빠리에서 최초로 나타난 칼리지 가운데 하나는 부유한 상인 로베르 드 소르봉(Robert de Sorbon)이 1258년에 설립한 것으로, 이 소르본느(Sorbonne)는 지금도 유명하다. ... 중세 말에는, 대학 강의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그 대신 칼리지가 교육업무의 대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

명백한 온갖 결점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중세 문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 대학 졸업생들은 전문직에 종사하였다. 대학을 떠난 문학석사들은 학교 선생이 되거나 관리가 되었다. ...

(서양중세사, pp.411-418)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27일 토요일

조선시대 수전농업(직파법과 이앙법)

연작상경의 작부체계와 함께 『농사직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벼농사에 대한 강조이다. 그 경작법은 세 가지였다. 묘판에 씨앗을 뿌리고 유묘를 잘 키운 다음 나중에 본답에 옮겨 심는 현재 흔히 볼 수 있는 이앙법(移秧法)은 그 중에 세 번째로 서술되어 있다. 첫 번째는 물이 흥건한 논에 처음부터 씨앗을 뿌리고 키우는 수경직파법이고, 두 번째는 밭작물을 키우는 것처럼 물이 없는 논에 씨앗을 뿌리고 키우는 건경직파법이었다. 이 중에 기술적으로 가장 발전된 재배법은 수경직파법으로 오래전부터 해 오던 방식이며, 15세기 당시에도 가장 일반적인 벼 재배법이었다. 건경직파법은 물 부족으로 수경직파법을 할 수 없을 때 오랫동안 터득해 온 밭작물 재배법의 노하우를 이용해 벼를 재배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이앙법은 1년 중 항상 물이 차여 있을 정도로 물이 풍부한 매우 제한적인 논에서만 가능한 예외적인 방식으로 기술수준도 낮았다.

혹자는 『농사직설』의 편찬의 가장 큰 목적이 벼농사 기술의 안정적 확립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 수경직파법을 하다가 제때에 비가 오지 않아 건경직파법을 하면 거기에 드는 제초작업의 노동력은 비교할 수 없이 많이 필요했다. ... 그러나 이앙법은 인수와 배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여건 아래에서만 가능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농사직설』에서는 농민들에게 되도록이면 하지 말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따라서 15세기 당시에 이앙법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 시대가 흐를수록 매우 고도의 경작법이 개발되었다. ... 나아가 메마른 논에서 이앙을 할 수 있는 경작법까지 개발되었다. 18세기의 대표적 농서 『산림경제』에 제시되어 있는 '건앙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건경직파식 벼 재배법이나, 건앙법과 같은 독특한 이앙법은 그야말로 수리시설이 열악한 여건에서 조선의 농민들이 개발해 낸 고도의 벼 재배법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벼농사는 전기의 직파법에서 후기의 이앙법으로의 전환이 가장 큰 역사적 흐름으로 이해된다. 이앙법은 그 자체로 벼의 높은 수확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한 해에 벼와 보리를 번갈아 심음으로써 1년 2모작을 가능하게 하는 수준 높은 기술이었다. 이앙법은 그만큼 생산력의 획기적인 증가를 상징하는 것이다. ...

(한국사특강, pp.292-296)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26일 금요일

문종대 고려 중앙집권체제의 완성

현종(顯宗)이 재위 22년 만에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세 아들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다. 덕종(德宗)‧정종(靖宗)을 거쳐 11대 문종(文宗, 1047~1083) 때에 이르러 지배체제를 비롯한 문물제도의 보완과 재정비를 통해 고려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 원년(1047)에 율관(律官)들로 하여금 법률을 정리하게 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3년(1049)에는 양반공음전시법(兩班功蔭田柴法)을 새로 제정하, 5년(1051)에는 향리의 9단계 승진규정을 마련했으며, 6년(1052)에는 사직단(社稷壇)을 신축하고, 왕실 봉작(封爵)제도와 태자첨사부(太子詹事府)의 직제를 정비하는 등의 조치가 그러한 예였다. ... 마침내 재위 30년(1076)에 이르러 그때까지 정비를 거듭해 온 관료체제를 더욱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백관들에 대한 반열(班列)의 차서까지 정했고, 또한 관리들에게 복무의 대가로 지급하던 양반전시과(兩班田柴科)를 다시 고치고, 아울러 현물로 주는 녹봉제를 재정비함으로써 고려의 제도적인 정비가 일단 완결을 보게 되었다.

(한국사특강, pp.55-56)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조선의 지방행정(관찰사와 8도제)

고려시대의 지방 통치는 향리들에게 거의 다 맡겨지다시피 했다. 중앙정부는 시찰관으로서 안찰사(按察使)를 5도에 파견하여 반년 임기로 순행하는 제도로서 향리들의 통치를 감독했다. 후기로 내려오면서 도의 행정적 기능이 강화되고 지방사회의 분화 발전에 따라 지방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가 필요해졌다. 안찰사는 1389년(공양왕 원년)에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바뀌었다가 질품을 재상급으로 올려 전임(專任)의 관찰사제가 정착했다. 조선시대의 도의 관찰사제도가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로써 중앙집권화가 일보 전진하여 지방행정체제의 관료화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는 각 지방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이제 지방 호족의 군백성이 아니라 왕의 백성으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인력으로 동원될 수 있는 체제가 잡혔다. 1409년(태종 9)에 8도의 윤곽이 잡히고, 1413년(태종 13)에 지방제도의 개혁이 대대적으로 단행되어, 대소 군현의 병합을 비롯해 여러 조정 장치가 이루어져 8도제가 이루어졌다.

(한국사특강, p.81)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조선의 관품체계와 인사제도

한편 조선의 관료는 누구나 관품체계 속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조선초기의 관품제는 관품이 관직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자체가 하나의 기준으로도 기능을 하였다. 이것은 관직을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관품을 통하여 지배층의 일원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따라 중앙과 거의 동질적인 지배층이 전국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관직의 수보다 훨씬 많은 규모의 지배집단을 효과적으로 편제할 수 있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관품은 18품 30계로 이루어졌는데, 관품에서의 기본적인 구분선은 4품과 5품 사이로서 대부大夫(將軍)와 사士(郞, 尉)로 그 칭호를 달리하였다. 그리고 관직과 연관하여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당상관, 그 아래를 당하관이라 하였으며, 종6품으로 기준으로 그 이상을 참상관, 그 아래를 참하관이라 하였다. 여기서 정3품이상의 당상관은 기본적으로 정치가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아 근무일수에 관계없이 왕의 명령에 의하여 승진이 되었다. 참상관과 참하관은 거관去官하여 승진하는 데 필요한 근무일수에 차별이 있다. 인사발령에서도 대부 이상은 왕의 교지敎旨에 의하였으며 대간臺諫의 서경署經이 면제된 데 비하여, 사士인 낭계郎階의 경우는 교첩敎牒의 형식으로 발령되었고 대간의 서경을 거쳐야 했다. 이는 고려시대에 모든 관원의 인사에 대간의 서경이 필요하였던 것과 비교하면 왕의 인사에 관한 권한이 강화되면서 귀족적인 성향이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中, 한국사 개요)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집현전集賢殿과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

유교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문물제도를 유교적인 것으로 재정비해야 했고 유교정치를 담당할 많은 유신을 필요로 했다. 대명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하여도 학자적 관료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은 조선이 대명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유교국가로 발전하기 위하여 불가결한 요건이었다. 조선 개국 초에는 많은 인재들이 개국에 동참하였으므로 인재난은 없었다. 그러나 태종 10년(1410)이 되면 개국 초의 인재가 대부분 사라지게 되어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은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세종 2년(1420) 3월 집현전集賢殿은 그러한 국가적 요구에 부응하여 설치된 것이었으며, 그것은 세종대의 문화와 정치의 수준을 높여준 원동력이 되었다.

세종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뽑아 집현전을 채웠으며 그들로 하여금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학술적인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집현전관集賢殿官은 경연經筵, 서연書筵, 지제교知製敎, 사관史官, 시관試官, 고제연구古制硏究, 편찬사업 등 학술적인 직무를 수행하였고,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두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쟁쟁한 학자들이 양성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유교적 의례 제도의 정리작업과 편찬사업이 전개되었다. 유교정치를 할 수 있는 기틀이 여기서 만들어졌고 세종대의 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조선왕조의 성립과 대외 관계 中, 한국사 개요)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명청대 신사층의 형성

명대 중엽 이후부터 청 말까지 국가의 지배를 보조하는 중간적인 지배계층으로 신사층紳士層이 있었다. 이들은 휴직 또는 퇴직한 관료로서, 관직의 경력이 있든지 아직 관리가 되지는 못했으나 과거제, 학교제 등을 통해 일정한 학위를 소지한 생원生員, 거인擧人(3년에 한 차례 치르는 향시 합격자), 공생貢生, 감생監生(최고학부인 국자감의 학생) 등으로 관위를 지망하는 사람들이었다.

... 그러나 명 중기 이후 이갑제 질서가 해체되어 가면서 관직에 나가지 못한 학위소지자들이 관직경력자들과 더불어 향촌의 질서유지에 지도적 역할을 하면서 이들은 국가나 평민으로부터 크게 보아 신사층이라는 하나의 계층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

... 신사는 향촌의 질서를 유지하고 경제적인 활동을 통해 공익과 사익을 추구했으며 향촌을 교화하고 여론을 지배했다. ... 이는 또한 신사의 영향력을 통해 이갑제 질서의 공백부분을 보충하려던 국가와 향촌사회의 요청에 부응해 신사가 공적인 역할을 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사는 ... 특권을 이용하거나 때로는 남용해 ... 사익을 우선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신사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들이 사리사욕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들의 특권이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농민의 부담으로 전가되었고 한편으로 향촌사회의 분해를 조장하는 부정적 기능도 했다. ...

명 말과 청 초의 동란기에 자위를 위해 무장했던 신사는 강력해 보이는 청조권력이 자신들의 사회적 특권을 그대로 보장해 주리라는 전망이 보이자 청조에 투항해 향촌사회에서 국가권력을 보좌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 국가권력으로서는 때로 신사를 탄압할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이들을 체제 내로 포섭하지 않고서는 원만한 통치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신사층은 왕조의 존망을 초월해 사회의 지배적인 계층으로서 청대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했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p.263-266)

Posted via web from monpetit's posterous

2010년 3월 23일 화요일

안사(安史)의 난과 성당(盛唐)의 종언

7세기 후반이 되면 (당의) 율령律令통치가 동요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 단적인 표현이 바로 도호逃戶였다. 도호란 일반 민호가 국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이 타지역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무후대부터 현종대에 걸쳐 나타난 이러한 현상은 자연재해나 관리들의 폭정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토지의 겸병에 의한 소농민의 몰락과 유랑 혹은 과도한 부賦‧병역兵役의 편중 부담이 그 원인이었다.

이에 대해 국가에서 기존의 정책을 답습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었다. 따라서 객호客戶를 본적지로 송환시켜 호적에 재등재시키는 기존의 방식에서 객호의 존재를 인정하고 거주지의 호적에 등재토록 하는 등 정책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병농일치를 기반으로 한 부병제府兵制의 운용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결국 천보원년(742)에 변경에 10개의 번진藩鎭이란 군사 통치기구를 두었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절도사節度使를 두면서 점차 직업적인 모병제도가 일부 도입되었다. 이는 병제 전반이 부병제에서 모병제로 이행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모병제로의 전환은 당조에 재정의 부담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안겨 주었다. 부병제는 자비부담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당조가 군대를 유지하는 데에 별대른 재정부담이 없었지만, 모병제로 바뀌면서 병사의 의료와 식량 및 생활비까지 지급해야 하는 등 부담이 늘어났다. 여기에 이들을 거느리고 있던 절도사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 이 상황은 안록산安祿山이 등장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9년 동안 화북지역을 전란으로 몰아넣은 (안사의) 반란의 영향은 매우 지대했다. 우선 호구 수가 반란 전 890만 호에서 반란 직후에 290만 호로 격감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반란 전부터 궁핍하던 재정이 한층 더해졌다. 또 반란에 가담했던 절도사들이 거의 그대로 지역을 장악한 채 분권적인 행동을 취했다. 게다가 부병제는 완전히 무너져 모병제로 전환되었고, 균전제均田制와 조용조제租庸調制도 완전히 붕괴되었으므로 율령제 지배는 여기서 완전히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p.176-178)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22일 월요일

로마사회의 변화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포에니 전쟁 이후 신흥부유층의 출현, 그리고 라티푼디움의 유행과 더불어, 로마사회의 매우 중요한 변화는 자유농민층의 몰락이었다. ... 자유농민의 몰락은 시민군의 약화라는 군사면의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건전한 중산층의 몰락으로 로마사회는 빈부의 양극화현상을 보이고 그것은 매우 심각한 사회불안을 조성하게 되었다. ...

그라쿠스(Gracchus) 형제의 개혁은 바로 이러한 사태를 시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된 목표는 자유농민을 부활시킴으로써 사회불안을 일소하고, 로마의 군사력을 옛처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스키피오의 외손자요 평민출신 집정관의 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Tiberius) 그라쿠스는 기원전 133년에 호민관으로 선출되자, 리키니우스법의 제한을 넘어서 불법으로 점유한 토지를 몰수하여, 무산시민(proletarii)에게 분배하려는 개혁안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에 의하여 그의 지지자들과 더불어 살해되고 말았다. 기원전 123년에 호민관으로 선출된 동생 가이우스(Gaius)는 더 광범한 사회층의 지지를 획득하고 원로원을 고립시킴으로써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가난한 시민에게 시장가격보다 싸게 곡물을 판매하고, 카르타고의 옛 영토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무산시민을 이주시키는 방안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는 한편, ... 반대파의의 공격에 몰린 가이우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사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통하여 로마으 지배층은 원로원을 중심으로 기득권과 현상을 유지하려는 옵티마테스(Optimates: 閥族派)와 그들에 대항하여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포풀라레스(Populares: 民衆派)로 갈라지고 이후 약 100년간 두 파 사이에는 내란이라고 할 정도로 치열한 정권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

(서양사개론, pp.108-109)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유럽의 중세 도시

그러나 로마 제국 후기 이후 도시 문화는 전반적으로 위축되었으며 곳에 따라서는 단절되었다. ... 중세 도시의 본격적인 성립과 발달은 상업의 부활 이후 상업의 발달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중세 도시들은 대부분 ... 원격지 상업의 중심지와 국지적 상업의 교통 요지에 위치해 있었다. ...

그러나 봉건사회의 생산력의 한계로 말미암아 중세 도시는 일정한 크기 이상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 주민 수가 10만 명이 넘는 도시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거주 인구가 1만 명 이상이 되면 대도시로 취급되었다. ... 인구가 2,000~1만 명인 도시는 중도시에 속했고, 500~2000 명인 도시는 소도시로 분류되었다. ... 중세 도시들 가운데 90~95%가 소도시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중세 사회에서 도시는 광대한 농촌 사회 속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작은 섬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봉건적인 농촌 사회로 둘러싸여 있는 중세 도시는 봉건적 생산관계에 기생하는 한편, 교환경제와 수공업의 거점으로서 봉건적 생산관계를 해소시키는 작용을 했다. ... (중세 도시의 독특성은) 우선 중세 도시는 공간적으로 성곽도시였다. ... 성탑과 성문이 있는 성곽은 도시가 단순한 요새가 아니라, 성곽 밖의 봉건적 농촌 사회의 지배 원리와는 전혀 다른 독자적 법률이 지배하는 예외적이고 특수한 영역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둘째, 중세 도시는 토지 소유와 농업에 경제적 기초를 두었던 고대 도시와는 달리, 농촌과 사회적 분업 관계에 있는 상공업 도시였다. ... 도시는 시장을 통해 주변 농촌의 경제를 장악하고 지역 경제생활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

셋째, 도시의 주민은 신분적으로 자유로운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도시민은 자유인이고 도시는 개인적 자유와 능력을 바탕으로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지위 상승의 길이 열려있는 역동적 사회라는 사실이 ... 농노들을 도시로 유인하는 주요인이었다. ...

넷째, 중세 도시는 자유로운 시민들의 서약 공동체였다. ... 중세 도시에서 시민이란 곧 서약자였다. ... 이른바 도시 영주라고 하는 지배자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조합을 결성해서 공동체를 이루는 수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11세기부터 상인들의 주도 아래 서약 공동체가 성장했다. ...

다섯째, 중세 도시는 영주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독자적인 도시법에 기초한 자치 도시였다. ... 도시 영주의 이런 봉건적 지배 아래서는 도시민의 자유로운 직업 활동과 재산권 행사가 보장될 수 없었다. 그래서 도시민은 이를 보장할 수 있는 정치권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 확보 방법으로 도시민들은 화폐를 필요로 하는 도시 영주에게 금전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영주의 이런 권리들을 매수했다. 매수할 수 없는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영주와의 유혈 투쟁을 통하여 도시의 자치권을 획득했다. ...

마지막으로 중세 도시의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도시 안의 길드 조직이다. ... 대체로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상인 길드가 먼저 결성되고 그로부터 별도의 수공업자 길드가 생겨나서 직종별로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 (길드는) 상호부조와 친목을 목표로 하여 생겨난 공제조합적‧친목적 성격의 단체였다. ... 조합원 사이에 경쟁을 배제하고 이윤 획득의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하기 위해 상품의 생산과 유통 과정을 강력히 단속하는 규제 단체적 성격을 띠게 했다. ...

(서양사강의, pp.175-181)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20일 토요일

훈구와 사림의 교체

훈구와 사림의 대립에 대하여 이들을 서로 다른 사회계층으로 간주하고, 그 연원을 고려 말로 소급해서 추적하면서, 사림 세력이 15세기 내내 중앙 정부의 집권력 강화에 저항해 왔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리하여 사림 세력이 거듭되는 사화에도 불구하고 선조대 정계를 장악한 것을 '지배세력의 교체'로 간주하고 '성리학(性理學)'과 '중소지주의 승리'라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강력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중종대 이후의 소위 '사림' 세력 가운데는 이전의 '훈구' 세력의 후예가 많고 경제적 기반도 대지주 출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실증적 성과에 기초한 것이다. 따라서 '훈구'에서 '사림'으로 '지배세력'이 '교체'되었다는 통설은 제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이 자신의 경제적 기반과는 별도로 중소지주적 지향을 강하게 내보였고, 특히 사상적으로 성리학 내지 주자학 정치사상을 더 철저하게 구현하려는 정치세력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 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문제는 왜 15세기 말이 되어서야 '사림'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였나는 점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당시의 농업 생산력 발전 단계와 함께 수조권(收租權) 분급제의 소멸과 지주제의 전면적 부상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는 추론이 나오고 있다.

사림 세력의 등장과 함께 언론 삼사의 위상이 제고되고 전조(銓曹) 낭관(郎官)의 통청권과 자대제가 확립되어 이들 부서가 명실상부한 청요직(淸要職)으로 부상한 것은 권력 구조상의 중요한 변화였다. 그리고 정치참여층이 확대되고 공론정치의 원칙이 확립된 것은 중세 정치의 발전으로 간주되었다.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上, pp.367-368)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요세와 백련결사

백련사 또한 수선사와 비슷한 시기에 결성되어 불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신앙결사였다. ... 초기에는 지역의 토호층이나 일반민, 그리고 지방관의 배려로 유지 발전하였으나, 1230년대 이후 최우 및 그와 밀착한 중앙관직자, 문신관료층의 지원과 관심으로 크게 번창해 갔다.

백련결사를 결성한 요세(1163~1245)의 사상은 지눌의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요세의 사상은 법화삼매참(法華三昧懺)천태지관(天台止觀)정토구생 (淨土求生)으로 요약할 수 있다. 법화삼매참을 통해 죄와 업장을 참회하고 없애며, 본격적인 천태교관법을 행할 것이며, 정토에 태어나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참회와 정토를 강조하는 데서 요세가 복잡한 이론보다 종교적 실천을 수반하는 신앙체험에 중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요세가 참회를 강조한 것은, 교화의 대상을 막중한 죄를 지어 자력으로는 도저히 해탈할 수 없는 가련한 중생으로 생각했던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은 지눌이 최소한 '지해(知解)' 정도를 갖고 스스로 발심할 수 있는 의욕적인 인간, 보살에 가까운 인간을 염두에 두었던 것과 구별된다.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上, pp.270-271)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19일 금요일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進三國史表) 중에서 - 김부식

進三國史表

以爲今之學士大夫, 其於五經諸子之書, <秦><漢>歷代之史, 或有淹通而詳說之 者, 至於吾邦之事, 却茫然不知其始末, 甚可嘆也.

...

是以君后之善惡, 臣子之忠邪, 邦業之安危, 人民之理亂, 皆不得發路以垂勸戒. 宜得三長之才, 克成一家之史, 貽之萬世, 炳若日星.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

그리하여, 지금의 학자와 관리들 가운데 오경 제자의 서적과 진‧한의 역사에 대해서는 정통하여, 이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우리 나라의 사적에 대해서는 그 전말을 알지 못하니 이는 심히 개탄할 일이라고 생각하시게 되었습니다.

...

이리하여 임금과 왕후의 선악, 신하의 충성과 간사함, 국가 사업의 평안과 위기, 백성의 안녕과 혼란에 관한 사실들이 후세에 교훈으로 전하여질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재능와 학문과 견식을 겸비한 인재를 찾아 권위있는 역사서를 완성하여 자손만대에 전함으로써 우리의 역사가 해와 별같이 빛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조선 태조 즉위 교서

洪武二十五年七月十六日乙未,
都評議使司及大小臣僚合辭勸進曰;
홍무 25년(1392) 7월 16일 을미일에
도평의사사와 대소신료들이 함께 의논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기를

王氏自恭愍王無嗣薨逝, 辛禑乘間竊位,
有罪辭退, 子昌襲位, 國祚再絶矣.
왕씨는 공민왕이 아들 없이 죽은 뒤 신우가 틈을 타서 왕의 자리를 가로챘고
그가 죄를 짓고 물러난 뒤 그의 아들 창이 이어받음으로써 국운이 다시 끊어졌습니다.

幸賴將帥之力, 以定昌府院君權署國事,
而乃昏迷不法, 衆叛親離,
다행히 장수들의 힘으로 정창부원군으로 하여금 임시로 나랏일을 보게 하였으나
곧 사리에 어둡고 법도를 지키지 않아 인심이 돌아서고 친척들까지 멀어지니

不能保有宗社所謂天之所廢,
誰能興之者也.
종묘와 사직을 보전할 수 없었으니 이는 하늘이 버리는 것을
그 누구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社稷必歸於有德 大位不可以久虛.
以功以德, 中外歸心, 宜正位號 以定民志.
사직(나라)은 반드시 덕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이고 왕의 자리는 오래 비워둘 수 없습니다.
공과 덕으로서 중앙과 지방의 인심이 모이는 분으로서 왕의 자리와 칭호를 바로잡아서 민심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予以涼德, 惟不克負荷是懼, 讓至再三,
僉曰: "人心如此, 天意可知. 衆不可拒, 天不可違."
執之彌固, 予俯循輿情, 勉卽王位.
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이 책임을 능히 짊어질 수 없을까 근심하여 두세 번 사양하였으나,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요청도 거절할 수가 없으며 하늘의 뜻도 거스릴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이를 고집하기를 더욱 굳게 하므로 나는 여러 사람의 의사에 따라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國號仍舊爲高麗;
儀章法制, 一依前朝故事.
나라 이름은 이전대로 고려라고 하고
의식과 제도도 한결같이 전 왕조의 전례에 의거할 것이다.

(조선 태조 즉위 교서 中, 태조 원년(1392) 7월 28일 정미일)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조조의 병호제와 둔전제, 그리고 인재 등용

조조[, 155~220]를 지지하던 호족들은 부곡部曲이라 불리는 사병집단과 빈객賓客이라 불리는 가신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정부가 일반 민호로부터 병력과 세역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조는 병호제兵戶制둔전제屯田制를 실시했다.

병호제란 병력의 확보를 위해 모병과 투항병을 중심으로 세습적으로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제도를 말한다. ... 쉽게 말하면 상앙변법 이래 채택되었던 병농일치의 제도가 병농분리의 제도로 바뀐 것이다. 이 제도는 이후 오와 촉에서도 실시되고, 남북조를 통해 실시되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병호의 신분은 저하되었다.

그리고 전란으로 토지 황폐화와 군량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채택한 것이 둔전제이다. 둔전이란 국가의 토지로서, 둔전의 경작자는 일반 주군민 중에서 모집하거나 피정복민을 강제로 이주시켜 확보했다. 둔전민에 대한 토지의 지급면적은 1호당 100무畝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되며, 호족의 토지를 소작할 때와 비슷하게 수확의 50~60% 정도를 국가에 바쳐 이를 군량으로 확보했다. 이로써 유민의 생활 안정과 안정적인 군량 확보를 할 수 있게 되어 ...

조조는 인재의 등용에 있어서도 유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명사의 추천에 의하여 관리가 되는 후한의 방식을 버리고 오로지 재능만 있으면 발탁하는 등용법을 채택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p.127-128)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파시즘의 발생 조건

우선 파시즘은 직접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이다. 이 운동의 초기 추종자는 그 대다수가 전선에서 싸운 군인들이었다. ...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그 사이 고도로 기능화된 산업사회에서 경제적‧사회적 재적응의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 초기의 파시즘은 내란의 모습을 띠고 시작되었고, 그런 만큼 대다수의 파시즘 운동은 독일의 돌격대나 이탈리아의 검은 셔츠단 등과 같은 군대식 조직 방식을 외형적으로 드러냈다.

둘째, 파시즘의 성장은 경제‧사회적 변동과 연관지어 고찰되어야 한다. ... 자본주의적 산업사회가 겪은 최대의 위기였던 1929~1934년의 경제 위기[대공황]는 이에 대해 가장 적게 대비하고 있었던 계층들에게 물질적 궁핍과 심리적 위기감을 심어주었다. 파시즘은 등장과 동시에 '반자본주의'와 '반사회주의'를 동시에 표방했기 때문에 독점자본의 횡포와 사회주의자의 책동을 증오하던 모든 계층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중의 전선 형성은 현실 정치 어디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파시즘은 양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종국에는 우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 나치의 집권을 도왔던 1932년의 선거에서 중요한 득표 기반을 제공한 것은 바로 이들 중산층이었다는 것이다. ... 나치당의 성공은 그들의 뛰어난 선전과 조직 활동보다는 전통적인 부르주아 정당의 분열과 무능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셋째, 파시즘 운동은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적 국가의 기반 위에서 성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파시즘 운동은 대중운동이 허용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이 있어야 성립할 수 있는 동시에, 의회정치의 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서양사강의, pp.582-583)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최초의 '총력전'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은 최대한의 인적‧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통제해야 할 필요성을 부각시켜, 국가와 사회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도와 형태는 다르지만, 각 참전국들은 전쟁의 수행을 위해 전시 집산 체제를 운영했고, 이것은 사회의 여러 분야에 대한 국가 간섭의 급격한 증대를 가져왔다. 전후에 평시 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을 때에도 이러한 경험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19세기적인 자유방임의 논리가 심각한 수정을 겪지 않을 수 없었고, 부르주아 유럽은 그 자체의 존립을 위해 내부적으로 재편성‧재조직되면서 재충전의 작업을 서둘러야만 했다. 동시에 이 전쟁을 고비로 유럽이 그동안 누려왔던 비유럽 지역에 대한 우위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서양 자본주의의 중심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대서양 저편의 미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비유럽 지역의 식민지에서는 민족주의와 급진 이념이 결합하면서 유럽의 지배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높이기 시작했다.

...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은 유럽의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지만, 유럽 제국과 식민지간의 관계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 지배-종속의 정치적 고리는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었다. 패전국 독일의 식민지는 승전국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게 거의 승계되었고, 이들 제국들은 식민 지배의 고삐를 포기할 의도를 보이지 않았다. ...

... 정치적 굴레가 사라진 후에도 자본주의 체제는 다국적기업과 같은 새로운 장치를 통해서 '국제적 분업'을 정교하게 발전시켜 왔다. 그 결과 옛 식민 지역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선진 자본주의 지역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고, ...

(서양사강의, pp.513-515)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비스마르크와 국가사회주의

187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수반하여 사회주의 세력이 신장되었다. 사회주의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비스마르크는 1875년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사회민주당'이 결성되자, 좌파 급진주의자들의 두 차례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을 기화로 1878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보수파의 승리를 확보한 뒤, 사회민주당을 불법 단체로 선언하고 노동조합, 소비자 협동조합, 각종 교육단체를 탄압했다(그러나 사회주의자의 하원 진출은 허용했다). 융커는 반사회주의적이었고, 선거에서 패배한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탄압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체제 유지를 위해 일방적인 탄압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선거에서 노동자들의 표를 확보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이완시키기 위해 그는 1883년 의료보험, 1884년 상해보험, 1889년 퇴직 보험 같은, 당시에 '국가사회주의'로 불린 온정주의적이고 '강제적인' 사회입법을 통하여 보수주의적 질서를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1870년대 이후 불황기에 노동자들은 선거에서 지속적으로 사회민주당을 지지했다. 사회민주주의의 급속한 성장은 비스마르크 체제의 쇠퇴의 한 징후였다.

(서양사강의, pp.429-430)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17일 수요일

백제 개로왕의 국서

延興二年 其王餘慶始遣使上表イ曰 臣與高句麗源出夫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輕廢隣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須整旅電邁 應機馳擊矢石暫交梟斬釗首 自爾以來 莫敢南顧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强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是滅亡之期 假手之秋也 且高麗不義 逆詐非一或南通劉氏或北 約蠕蠕 共相脣齒 謀凌王略

연흥(延興) 2년(472) 그 나라 임금 여경(餘慶-개로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고 표(表)를 올렸다. ... 가로되 신(臣)과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윗대 때는 옛 정을 두터이 여겼지만 그 할아비 쇠(釗)는 이웃 간에 우호(友好)를 가벼이 던져버렸습니다. 쇠(釗, 고국원왕)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제 땅으로 넘어 오자, 신(臣)의 할아버지 수(須, 近仇首王)가 군대를 가지런히 한 다음 벼락처럼 달려갔습니다. 틈을 보다가 한숨에 달려가 치니 화살과 돌이 잠깐 동안 어지러이 날아다녔습니다. 드디어 쇠(釗) 머리를 베어 높이 매다니 그때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습니다. ... 지금 련(璉, 장수왕)이 죄를 지어 나라는 아주 엉망이 됐고 대신(大臣)과 큰 가문들은 죽음을 당해 모두 사라질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죄와 악이 차고 쌓여 백성이 허물어지고 흩어졌습니다. 지금이 바로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요, 남 손을 빌릴 때입니다. ... 또 고려(高麗)는 의롭지 못한 나라여서 천명을 거스르고 사람을 속인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가끔 남쪽으로는 유씨(劉氏, 송나라)와 사신을 주고 받고, 또 북쪽으로는 유유(蠕蠕)와 동맹을 맺습니다. ... 고구려가 송(宋), 유유(蠕蠕)와 서로 입술과 이빨 같은 관계를 맺고 (북위) 임금님 땅을 침범하려는 잔꾀를 부리고 있습니다.

[위서(魏書) 卷 100 열전(列傳) 88, 百濟 개로왕(蓋鹵王, 제21대 王, 재위 455-475) 기사]

 

臣與高句麗源出夫餘

  •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夫餘에서 나왔다. 『위서魏書』 [뿌샘, p.145]
  • 백제의 선조는 고구려국 출신이다. 『수서』권 81, 「동이열전」, 백제 [뿌샘, p.145]
  •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하였다(기원전 37).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p.37]
  • 백제는 고구려 주몽의 아들로 알려진 온조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의 하남 위례성에 정착한 후 마한 소국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p.47]
  • 백제국을 세운 온조집단은 부여족 계통으로서 고구려에서 이동해 와서 한강유역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부여족의 전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부여씨를 칭하였다. 이 점은 한강유역에 고구려 계통의 돌무지 무덤이 존재하고 있다든가,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다”(臣與高句麗源出夫餘)고 한 사실-『위서』백제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길사 한국사, p.3, p.31]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强族 戮殺無已

  • 장수왕 63년(475) 9월에 왕이 군사 30,000을 이끌고 백제에 침입하여, 백제왕의 도읍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백제왕 부여경夫餘慶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6 [뿌샘 1권, p.235]
  • 고구려는 6세기에 이르러 안장왕이 피살되고(531), 안원왕(531~545) 말년에는 귀족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대립과 싸움이 일어나 내부 분란에 빠졌다. 장수왕이 79년이나 장기 집권하면서 지배 세력이 바뀌지 않아 생긴 여파였다. 내정이 어지러워지면서 국력은 약해졌고,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잃었다. ... 고구려가 내부 분란을 수습하고 왕권의 안정을 되찾은 것은 평원왕(559~590)대였다. [뿌샘 1권, p.255]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북위에 사신을 보내었으나 동맹을 맺는데 실패

  •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427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남진 정책을 더욱 밀고 나갔다. ... 고구려의 침략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은 백제였다. 이에 백제는 472년(개로왕 18) 중국의 북위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청하였으나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고구려는 475년(장수왕 63) 3만의 대군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붙잡아 죽이니 이에 백제는 서울을 남쪽의 웅진熊津으로 옮기게 되었다. ...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의한 한성 함락과 웅진 남천은 백제에게 커다란 시련을 안겨준 것으로 무엇보다도 한강 유역의 상실은 백제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왕권의 실추와 眞氏·解氏 등 왕비족의 창궐은 백제의 내부적 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이 때부터 백제는 다난한 시기를 겪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백제의 부흥을 꾀한 이는 동성왕(479~501)이었다. 그는 신라의 왕족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침략에 대한 백제·신라의 동맹관계를 굳게 하고 또 종래의 외척세력을 배제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려는 의도에서였다. ... 이때 백제의 국력이 내외로 크게 신장되고 있었음은 무령왕(501~523)이 중국 남조의 양梁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강화하고 양으로부터 寧東大將軍의 관작을 받은 것에서 엿볼 수 있다. [한국사통론, pp.85-86]

 

고구려의 대중국정책

  • 고구려는 중국세력과의 대립을 통하여 더욱 국세를 신장시켰다. 동천왕(227~248)은 중국이 위魏·촉蜀·오吳 삼국으로 분립하자 이들의 대립관계를 이용하여 오와 친교를 맺었고 왕 16년(242)에는 중국과 낙랑을 연결하는 서안평을 공격하였다가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오히려 수도까지 함락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천왕(300~331)은 그 뒤 중국이 북방민족들의 침입을 받아 5호 16국의 혼란기로 접어들게 되자 끝내 서안평을 점령하였고, 이어 낙랑군을 공략하여 우리 나라 안의 중국세력을 완전히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313). [한국사통론, p.77]
  • 평양천도 후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와 두루 교통하여 그의 압력을 배제하면서 남하정책을 강행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장수왕 21년(433)에 백제와 신라가 동맹관계를 맺은 것은 이러한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한국사통론, p.84]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신라 일통삼한(一統三韓) 의식의 형성

일통삼한 인식은 신문왕 12년(692)에 당(唐)이 요구한 무열왕의 묘호인 '태종(太宗)'의 개칭에 대한 회답 속에 나타나고 있다.

"... 선왕 춘추도 자못 어진 덕이 있었고, 더구나 생전에 어진 신하 金庾信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에 힘써 삼한을 통일(一統三韓)하였으니, 그의 공적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 ..." [삼국사기 卷8, 신라본기8 신문왕 12년]

무열왕의 묘호로 '태종'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로 일통삼한, 즉 삼국통일의 달성이라는 공적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그러면 무열왕 때 이미 일통삼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 이렇게 보면 문무왕대 고구려를 멸한 이후 '일통삼한' 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태평에 이르지 못했다'는 김유신의 말에서 고구려의 멸망이 곧 삼국통일의 완성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문왕 6년(686)에 세워진 「청주 운천동 사적비(寺蹟碑)」 속에 '民合三韓而廣地'라는 구절이 있어 신문왕대에는 일통삼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보다 1년 전(685)에 신문왕은 백제와 고구려 옛 땅, 원신라 지역에 각각 3개의 주(州)를 두어 전국을 9주로 정비했다. 9주는 곧 천하를 의미하는 것으로 통일의식을 과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왕 7년(687)에 고구려‧백제민과 말갈인으로 조직한 9서당(誓幢)의 완비 또한 이러한 의식을 강조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일통삼한 의식은 문무왕대 당군을 축출하여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함으로써 형성되기 시작해, 이후 신문왕대에 강조되면서 신라인의 의식으로 자리잡아갔다고 하겠다. 최치원은 고구려는 마한, 백제는 변한, 신라는 진한의 계승국으로 보았는데, 이는 삼한과 삼국을 일치시켜 보는 인식이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음을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박미선, 「일연(一然)의 신라사 시기구분 인식」, 『역사와 현실 70』, pp.161-163)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후발 산업국가들의 산업혁명 따라잡기와 영국 추월

1870~1914년에는 후진국들이 선진국들을 따라잡는 경향이 나타났을 뿐 아니라, 독일, 미국과 같은 일부 후발국들이 선발국인 영국을 제치고 선두에 나섰다. ... 19세기 말 미국과 독일에서는 새로운 강철 제조 기술, 근대적 화학 기술, 자동차, 전기 산업 등 새로운 기술과 산업이 발전했는데 이를 '제2차 산업혁명'이라고 한다.

제2차 산업혁명이 1세기 전 영국의 산업혁명과 달랐던 것은 생산기술 발전이 근대 과학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진행되었다는 데 있다. 영국의 숙련공들이 주로 작업 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기술을 습득했던 것과는 달리 독일과 미국에는 체계적인 과학 기술 교육을 통해 훈련된 기술자, 숙련공들이 존재했다. 이들이 근대 과학 지식을 응용해서 새로운 생산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제2차 산업혁명을 이룩한 것이다.

최초의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영국이 제2차 산업혁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했다. 가령 미국과 독일에서는 19세기 말 공업화가 진전되고 빠른 속도로 도시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전기 가로등이 활발히 건설되었는데, ... 이미 가스등을 가지고 있던 영국에서는 많은 비용을 들여 기존의 가스 가로등을 파괴하고 다시 전기 가로등을 건설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영국에서는 전기 산업 시장이 미국이나 독일 같은 신흥 공업국에서처럼 빠른 속도로 성장하지 못했고 이는 전기 산업 발전을 둔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서양사강의, pp.387-388)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16일 화요일

극화수업

극화수업이란 줄거리를 가진 극의 형태로 진행되는 수업이다. ... 극화수업은 학생의 조직에 따라 크게 세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학급에서 극화수업 연기자를 뽑아 수업하는 방법, 학급의 모든 학생들을 모둠으로 나누어 모두 똑같은 극을 만들여 참여하게 하는 방법, 학급의 모든 학생들을 모둠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극을 만들어 참여하게 하는 방법, 즉 주제를 몇 개의 소주제로 나누어 연극을 준비하는 '협동식 연극수업'이다.

극화수업을 할 때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어떤 형식으로 극화수업을 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학습 목표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극의 형식에 따라 극에서 다루는 내용은 물론 그 내용을 구성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 어떤 극으로 구현할 것인지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흔히 극화수업하면 추체험을 떠올린다. 그런데 모든 극을 통해서 추체험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습 목표에 적절한 극의 선택은 극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

둘째, 극화수업의 대본은 학생들이 써야 한다. 기존의 대본을 극화하는 것은 역사 수업이 아니라 연극 수업이다. ...

셋째, 극화수업은 극을 준비하는 과정, 실연하는 과정 못지않게 후속 토의와 평가 과정이 중요하다. ...

(역사교육의 내용과 방법, pp.231-235)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이야기식 역사 수업의 유용성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가르치면 다음과 같은 점에서 유용하다. 첫째, 역사 이야기는 그 자체로 역사의 문화적 틀인 동시에 아동에게 친숙한 방법이며 역사가들도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역사를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적합하다. ...

둘째, 이야기는 서술 형식일 뿐 아니라 역사적 사고력에 적합한 인지 도구 내지는 사고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학생들은 과거에 관한 이미지를 쉽게 구축할 수 있다. 등장인물과 갈등 구조를 통해 학생들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학습자는 역사적 사건을 연대순으로 이해하며 시간의 연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

셋째, 이야기는 맥락적 이해에 도움이 된다. 이야기는 다양한 내적 관계들의 총체를 단일한 전체로 나타내는 것이므로, 이야기를 접하고 난 후 인물의 행위와 배경을 알 수 있고, 이를 종합해 상황을 맥락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넷째, 이야기는 학생들이 자신과는 다른 시대‧사람‧관점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며, 역사적 인물의 입장에서 그 인물을 통찰하게 해준다. ... 과거의 상황을 상상하고 거기에 감정이입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교육의 내용과 방법, pp.220-221)

몽골제국의 정복사업 기반

(몽골의) 대정복사업이 가능했던 것은 우선 압도적으로 강대한 군사력 때문이었다. 그 기반은 천호‧백호제 및 이를 기초로 구성된 약 1만 명의 케식(Keshig)이라는 친위대의 무력 덕분이었다. 천호장千戶長이나 백호장百戶長은 부족회의에서 선출된 부족장이나 씨족장과는 달리 칭기즈칸 개인에 대한 충성이 강했던 군사조직이었다. 그러니 오로지 몽골족의 엄청난 무력에 의해서만 정복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를 뒷받침해준 것은 당시 아시아의 내륙 대상로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슬람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몽골군에 대해 군수물자를 보급하고, 적정에 대한 첩보활동을 했으며, 외교사절의 역할을 하는 등 다방면에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몽골의 무력에 의존한 안정적인 대상로의 확보가 그들의 목적이었으며 양자의 이해가 맞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몽골군은 정복과정에서 엄청난 인명을 살상했을 뿐만 아니라 정복한 도시에서 많은 약탈을 자행했지만, 제국 건설의 기초가 되는 전문 직능인은 철저히 확보했다. 또한 몽골족의 서아시아 정복으로 인해 이슬람과 페르시아계의 결합을 가져와 원조元朝의 중국 지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p.232-233)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송의 문신관료제와 취약한 군사력

송대는 경제‧문화면에서 이전 시대에 뒤지지 않는 역대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지만 내륙아시아의 거린족, 여진족, 몽골족 및 티베트족 부족민들의 중국 내부로의 침입과 정복 역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왜 송조는 이들과의 무력대결에서 계속 취약점을 보였는가? 그 원인 중 하나는 무거운 국방비의 부담을 진 관료제도와 군사제도가 성립된 데 있었다. 게다가 문치주의적 문신관료제가 성립되면서 쿠데타의 가능성을 가진 무인 세력을 철저히 견제했고 과거제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 이러한 정책과 분위기는 송조를 군사적으로 허약한 상태로 만들어 놓았고 결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또 한 가지는 자신의 적에 대한 정보에 어두웠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진‧한과 수‧당 왕조는 교역과 사절을 통해 끊임없이 내륙아시아의 권력구조에 개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열된 부족 내에서 자신의 동맹자를 구하고, 강한 부족들끼리 서로 싸우도록 만드는 수법, 즉 이이제이以夷制夷메 매우 익숙했다. 따라서 북송과 남송이 보인 외교적인 어리석음은 내륙아시아의 민족들과 접촉을 갖지 못한 채, 정복왕조의 등장이라는 내륙아시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데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219)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1920년대 후반 도시화의 진전과 대중문화의 출현

문화사적 측면에서 1920년대 후반은 근대문명의 터전인 도시를 중심으로 이른바 식민지 근대성이 그 모습을 드러낸 시기였다. 이 무렵 식민지 지배의 여러 가지 인프라가 갖추어지고 이식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림에 따라 도시화가 진전되고, 자본주의적 소비풍조와 대중문화가 나타났는데, ...

그런데 식민지시기의 도시화는 일차적으로 식민통치의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는 과정이었다. ... 일제는 항만과 철도교통의 요지에 신흥도시를 건설하여 전통도시를 제압하려 하였다. ... 전차가 대중교통수단으로 구실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이후였다. 더불어 1928년부터 버스가 운행되어 대중교통 수단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자동차가 거리의 풍경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를 잡았다. ...

도시경관의 변화와 함께 1920년대 후반 서울은 근대적 소비도시로 탈바꿈해 갔다. 생산기반은 취약했지만 이식된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일상을 재조직하기 시작하면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상징인 백화점이 대중의 소비욕구를 자극했고, '모던보이' '모던걸' 등의 등장과 함께 양식당‧카페‧다방‧극장과 같이 의자 위에서 이루어지는 도시적 생활이 연출되었다. ...

1920년대 중반 신파극 주제가같은 유행창가들이 하나씩 음반화되면서 모습을 드러낸 대중가요는 1926년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이 노래한 <사의 찬미>가 전에 없는 히트를 치면서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下, pp.254-257)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15일 월요일

유럽의 가격혁명

16세기의 가격 상승(이른바 가격혁명)을 초래한 결정적 요인으로 흔히 신대륙의 귀금속 유입을 지적할 수 있다. 신대륙으로부터 금과 은이 대량 유입됨으로써 화폐량이 증가했으며, 이것이 가격 상승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 그러나 가격 상승 현상은 신대륙의 귀금속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이전부터 나타났는데, 이것은 인구 증가화폐 유통 속도의 증가 또한 화폐랑 못지않게 가격 상승의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알려준다. 인구 증가 시기에 수요 증대 및 시장의 확대와 더불어 생산자들 사이의 사회적 분업이 촉진되었고, 다양한 방식의 상품 생산이 한층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귀금속의 유입은 가격 상승을 더욱 가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격 혁명은 사회 내의 여러 집단에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생산이나 유통 부문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 가운데 혜택을 입은 부류가 있었고, 빈농은 더 가난한 상태로 떨어졌으며, 대토지 소유자들 중에서 자기 과시적인 낭비에 탐닉하던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토지를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격혁명이 사회의 특정 집단에게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다른 집단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분명한 것은 가격 상승 현상이 농업과 수공업, 두 부문에서 시장 지향적인 성격을 강화하고 나아가 자본주의의 발전 또한 촉진했다는 사실이다. 17세기 가격 하락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던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이러한 발전이 두드러졌다.

(서양사강의, pp.226-227)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14일 일요일

위클리프와 후스, 종교개혁의 씨앗

기존의 교회 조직을 비난하며 새로운 교리를 내세우는 이단자와 이단 조직에 대하여 정통 기독교회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특히 이들이 세속 영주에 의해서 보호되면 교회 법정은 속수무책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였는데, 옥스퍼드 신학자였던 그는 기존 교회의 교리와 정치적 기반을 공격했다. 그는 성사의 가치는 그것을 행하는 사제의 인물됨에 따르고[범법 사제 성사 거부], 영성체에서 예수는 오직 정신적으로 나타나며[화체설 공격], 면죄부는 무용한 것이고 구원은 개인적 공적보다는 신성한 예정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교회의 부와 사치를 공격하고 현세의 일에 대한 교회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위클리프의 설교는 당시 교회와 대립하던 영국의 군주와 귀족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 같은 이유로 롤라드파(Lollards)로 알려진 그의 추종자들은 헨리 5세(1413~1422) 때에 이르러서야 국가에 의해서 큰 탄압을 받았다. ... 프라하에서 위클리프 가르침의 선두 지지자는 후스(Jan Hus, 1373~1415)였는데, 그는 매우 인기 있는 젊은 사제이며 설교자로서 면죄부를 공격하고 교회의 예배 의식과 도덕률의 개정을 요구했다. ... 후스는 교회에서 파문당하고 대학의 교수 직도 박탈당했다.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하여 콘스탄스 공의회에 참석했던 후스는 거기서 이단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아 말뚝에 묶여 화형당했다. ... 16세기 종교개혁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자신도 후스의 추종자라 선언했다. 후스의 화형과 함께 종교개혁의 씨앗도 싹텄던 것이다.

(서양사강의, pp.212-214)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1910년대 해외 독립 운동 단체

지역

단체

특징

북간도(동만주)

중광단

대종교에서 설립 주도

북로 군정서

김좌진, 군사 단체

서전서숙

명동학교

민족교육기관

삼원보(남만주)

경학사

부민단

자치기구

신흥 학교(신흥 무관 학교)

군사 학교

밀산부(북만주)

한흥동

독립군 기지

연해주

권업회

신한촌에 설립

대한 광복군 정부 설립

대한 광복군 정부

임시 정부

대한 국민 의회(전로 한족 중앙회)

임시 정부

미주

대한인 국민회

박용만, 안창호, 이승만

대조선 국민군단

박용만, 군사 단체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의 실패

The French army's methods as we have seen assumed rapid campaigns in areas sufficiently wealthy and densely peopled for it to live off the land. But what worked in Lombardy or Rhineland, where such procedures had been first developed, and was still feasible in central Europe, failed utterly in the vast, empty and impoverished spaces of Poland and Russia. Napoleon was defeated not so much by the Russian winter as by his failure to keep the Grand Army properly supplied. The retreat from Moscow destroyed the Army. Of the 610,000 men who had at one time or another crossed the Russian frontier, 100,100 or so recrossed it.

(Eric Hobsbawm, «The Age of Revolution», VINTAGE BOOKS, 1996, p.87)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포스트모던 역사학과 기억 연구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록이며, 과거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과거가 곧 역사는 아니듯, 과거에 대한 기억 모두가 역사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이것은 역사가 수많은 기억 중에서 선택되어진 것이라는 뜻이며, 바로 여기에서 역사가 가지는 권위와 독점의 문제가 발생한다. 즉 의도되고 기록된 역사 속에 포함되지 못한 기억은 그대로 잊혀지게 되며, 잊혀진 기억은 역사적 사실에서 탈락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잘못 서술하는 것만이 왜곡은 아니다. 그것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서술하지 않는것 또한 분명한 왜곡이다. 일본의 우익이 위안부 문제를 서술하려 하지 않는 것, 우리의 역사가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의 행동에 대해 서술하지 않는 것 등이 그 예이다.

포스트모던 역사학은 역사학의 객관성에 대한 의문 제기, 즉 역사가 객관적 실재가 아닌 텍스트임을 밝힘으로써,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넘어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의 문제에 주목하고, 사회의 지배적 담론에서 배제된 역사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며, 거시적 역사가 간과하였던 하위주체들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도록 하였다.

최근 기억에 대하여 관심이 증폭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를 소수 엘리트가 아닌 하위주체들의 몫으로 돌리기 위해, 전문적 글쓰기 훈련을 받지 못한 그들에게도 역사 서술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함이다.

-- 도그마™ --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고려시대의 백정과 정호

고려시대의 백정(白丁)은, 천민이던 조선시대의 그것과 달리, 일반민의 주류를 형성하던 존재로서 일반 주‧부‧군‧현에 거주하면서 주로 농업생산에 종사하는 농민층이었다. 이들은 조세‧공부‧역역 등 일반적인 국역 의무를 졌고 국가에 대해 특정한 직역의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백정이라 불리었다. 한편 이들 백정과 달리 국가에 대해 특정한 직역을 부담하는 층을 백정과 구분하여 정호(丁戶)라 불렀다.

... 구분 기준에서는 일반적으로 경제력, 즉 토지소유의 규모의 차이에 따라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여기에 정호는 지배신분이고 백정은 피지배신분이라는 신분의 차이까지 고려하는 견해도 있다. 일정한 경제력을 갖춘 정호층은 국가가 차정한 특정한 직역을 부담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백정층은 요역과 기타 부담 이외에 직역 부담은 지지 않았다. 이때 직역은 일반적으로 군인호‧향리호‧기인호(其人戶)‧역호(驛戶) 등이 부담하는 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上, pp.244-245)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신문화사의 역사 서술 방법

신문화사는 마르크스와 아날학파로 대표되는 20세기 '사회사'에 대한 비판적 반성의 결과이다. 즉 "사람의 삶이 만들어낸 역사에서 사람을 찾아내서 복권시키는 것"이 바로 신문화사의 문제의식이다. 이를 위해 기존의 역사와는 다른 역사 서술의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두껍게 읽기', '다르게 읽기', '작은 것을 통해 읽기', '깨뜨리기'이다.

'두껍게 읽기'는 클리포드 기어츠의 '두꺼운 묘사'에서 파생된 개념인데, 사료를 통한 연구가 불가능한 인류학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는 역사적 자료가 보여주는 객관적 사실 이면에 숨어 있는 여러 층위의 맥락을 읽어낸다는 뜻이다. 마치 교육학에서 말하는 잠재적 교육과정(Hidden Curriculum)처럼 역사적 자료를 만든 사람이 미처 의도하지 않았지만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을 찾아본다는 것이다.

'다르게 읽기'는 전통적 관점과는 다른 맥락에서 역사를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동일한 역사적 사실도 누구의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작은 것을 통해 읽기'는 역사적 자료를 거의 남길 수 없었던 역사의 패배자, 또는 소수자의 역사를 복원해내기 위해, 빈약한 사료를 풍부하게 읽어낼 수 있도록 개발된 방법이다. 이를 '미시사'라고 한다.

'깨뜨리기'는 위의 세 가지 방법이 통합되어, 기존 역사학의 방법론과 서술 방식을 깨뜨리자는 뜻이다.

물론 이것이 역사학 자체를 아예 부정하거나 없애자는 것은 아니며, 기존의 역사학의 빛이 비추지 못했던 작은 골목들에 눈을 돌림으로써 역사학의 지평을 넓히는데에 그 의의가 있다.

-- 도그마™ --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2차 집단과 家, 그리고 族

우리는 종족(宗族; Clan)이 중국 사회에서, 카스트(Caste)가 인도 사회에서, 그리고 클럽(Club)이 미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2차 집단임을 보았고, 그와 같은 2차 집단들이 친족의 지배적 관계선(dyadic dominance)의 유형에 뿌리를 두고 있음도 보았다. 곧 종족은 부자(父子) 지배와, 카스트는 모자(母子) 지배와, 그리고 클럽은 부부(夫婦) 지배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들 세 민족의 2차 집단 안에서 인간 관계의 특징은 집단 외부인과의 관계의 특징이기도 하다는 것도 보았다. 간단한 의미로 말하여, 중국인은 친구와도 친족적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고, 미국인은 그들의 부모를 마치 사업의 동업자처럼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으며, 반면에 힌두인들은 모든 인간의 상호 작용을 계급적 차이로 다루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 세 사회와 문화에 있어 친족, 2차 집단 그리고 행위적 특성 사이에는 뚜렷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 일본의 '이에'(家; household)는 중국의 '챠'(家; home)와는 다르다. 혈연 또는 혼인과 무관한 사람들도 일본의 '이에'의 성원이 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은 중국의 '챠'에서는 있을 수 없다.

일본의 '도오조꾸'(同族; corporation)와 중국의 '쮸'(族)를 비교할 때 두 사회의 차이는 더욱 뚜렷해진다. 중국의 '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족(宗族)으로서 공동 조상을 가진 후손들로 이루어진 부계 친족 집단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오조꾸'는 일종의 조합(corporation)으로서 하나의 '혼께'(本家)와 여러 개의 '분께'(分家)로 이루어져 있다. '분께'는 '혼께'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분께'에 따라서는 '혼께'와 아무런 혈연 또는 인척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또한 '분께'가 '혼께'와 혈연 관계가 있는 경우에라도 '분께' 또는 그 성원들 가운데 누군가 이주하여 갈 경우 더 이상 '도오조꾸'의 성원이 될 수 없다.

(프란시스 슈, «이에모또», pp.10-11)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중국과 일본의 양자제도

중국인은 상속자가 없을 경우 우선적으로 형이나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택한다. 이것이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데릴사위를 얻어 가계를 이어가게 한다. 타인을 양자로 삼는 경우는 아주 드문 상황에서 뿐이다. 양자를 얻음에 있어 중국인은 항렬을 반드시 따진다. 데릴사위는 대부분 빈곤한 집 출신이며 특히 본인과 그의 가족들은 그러한 처지를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중국인은 일본인이 나이 차이가 많은 동생을 양자로 삼는다는 것을 안다면 무척 놀랄 것이다. 수에무라라는 마을에서 35살의 가장이 15살의 동생을 아들로 입적한 경우가 있었음을 엠브리는 적고 있다(Embree, 1939: 83쪽). 이와 같은 것은 중국인에게는 생각할 수도 용납될 수도 없는 것이며 친족 체계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범법 행위로 간주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중국인에게는 전통적으로 친족의 위계 질서 안에서 개인의 위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결코 변경될 수 없다. 이러한 원칙인 인척에게도 적용되며 (일본에서 허용되는) 혼자된 숙모와의 결혼은 중국인에게는 근친상간이나 다름없다.

(프란시스 슈, «이에모또», p.53)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12일 금요일

영국의 봉건왕정

영국의 노르만왕조는 정복왕조였기 때문에 유럽 대륙에 비하여 처음부터 왕권이 강대한 편이었다. ... 헨리 1세의 업적은 왕의 재판권 강화와 왕실재정의 정비였다. 헨리 1세는 국왕의 재판관을 전국에 파견하고(순회재판제의 시작) 왕실재정의 정비를 위하여 따로 재무관(exchequer)을 두고, 주장관인 셰리프(sheriff)로 하여금 1년에 2회씩 왕실의 수입과 지출에 관한 보고를 하게 하였다. ...

헨리 2세는 즉위하자마자 그 동안 세력을 신장했던 대제후를 누르고 왕권을 다시 강화하였다. ... 헨리 2세의 업적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왕의 재판권 강화와 전국적인 규모로의 확대였다. 헨리 2세는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클라렌든헌장(Constitutions of Clarendon, 1164)을 마련하고, ...... 그러나 교황으로부터 준엄한 문책을 받은 헨리 2세는 영국의 교회법정이 교황청에 소청하는 권리를 인정하는 등 양보하는 수밖에 없었다.

교회 재판권에 대한 통제는 실패하였으나, 일반 법정에 대한 왕의 재판권 강화와 확대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즉, 헨리 1세 때 시작된 순회재판제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 강화되고, 배심제가 확립되었다. ... 그리고 또한 봉건제후의 법정에서의 판결에 불만인 경우 왕립법정에 상소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러한 헨리 2세의 재판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영국의 특유한 보통법(common law)이 발전하게 되었다. 보통법의 뜻은 전국에 적용되는 법, 즉 왕국의 모든 사람과 모든 지역에 공통되는(common) 법이라는 것이다.

(서양사개론, pp.216-219)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중세도시의 코뮌운동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 활동의 성질상 봉건적 지배로부터의 해방, 즉 자유과 자치권을 원하였다. 이러한 자유와 자치권의 획득은 평화롭게, 즉 돈으로 사는 경우도 있었으나, 많은 경우 힘으로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러기 위하여 도시민들은 서로 서약(conjuratio)으로 단결하고 코뮌(commune)을 형성하였다. ... 이리하여 봉건귀족을 배제한 이른바 북유럽형과, 봉건귀족과 상공인이 존재하는 남유럽형의 구별이 생겨났다.

대부분의 도시가 12세기 중엽까지는 자유와 자치권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특허장(Charter: Privilegien)으로 문서화되었다. 그 내용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것은 신분의 자유경제활동에 필요한 여러 자유였다. 신분의 자유는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Stadtluft macht frei.)는 말과 같이 도시가 갖는 지역적인 특권으로서 도시 내에 1년과 1일을 거주하면 그 이전의 신분과는 관계없이 누구든지 자유로운 신분이 될 수 있었다. ...

중세도시는 자유와 더불어 영주재판권이나 교회법으로부터 해방되어 독자적인 재판권과 사법권을 갖는 특수한 법적 구역이 되고, 시참사회(concilium: curia)라는 독자적인 행정기관과 시민군 등을 갖는 자치체가 되었다.

(서양사개론, pp.212-213)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포에니 전쟁 2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241)은 시칠리아섬의 쟁탈전이었으며, ... 로마는 또한 이탈리아를 통일할 때와는 달리 새로 획득한 시칠리아를 동맹자로 취급하지 않고, 이를 속주(Province)로 만들어(B.C. 227) 생산물의 1/10을 공납으로 징수하고, 이를 위하여 징세청부제도를 도입하였다. 앞으로의 제국조직의 기본적인 틀이 마련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는 그 후 북부 아프리카나 이집트와 더불어 로마의 곡창 역할을 담당하게 되고, 라티푼티움(latifundium)으로 알려진 로마의 대농장 경영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202)은 ......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Hannibal)이 ...... 침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 한니발은 로마의 연패가 이탈리아 내의 '동맹자'들의 이탈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하였으나 그러한 현상은 부분적인 것으로 그쳤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의 결속은 견고하였으며 이는 로마의 통치정책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하였다. ...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Scipio, Africanus)는 한니발의 근거지인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평정하고(B.C. 206), 카르타고의 본거지를 직접 공격하였다. ...

제3차 포에니 전쟁(B.C. 149~146)은 카르타고가 해상무역에 종사하면서 그 국력이 다시 커지는 것을 본 로마가 이를 완전히 멸망시킨 전쟁이었다. ... 전 시민이 결사적으로 항전하였으나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되고 포로는 노예로 팔렸으며, 카르타고의 과거의 영토는 아프리카라는 속주가 되었다.

(서양사개론, pp.105-106)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정복왕조

정복왕조(Conquest Dynasties)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일 출신의 동양학자인 비트포겔(K. Wittfogel)이 사용함으로써 알려졌다. 그에 의하면 정복왕조란 중화제국 역사상 전형적인 중국왕조 외에, 이들과 항쟁하면서 때로 이들을 정복하고 지배한 요遼를 비롯해 금金, 원元, 청淸 등, 유목민족이 건립한 여러 왕조들을 가리킨다.

그는 남북조시기에 중국 내지로 이주해서 중국의 일부를 점령해 지배했던 북위 등을 침투왕조(Infiltration Dynasties) 혹은 잠입왕조라고 하여 정복왕조와 구분했다. 침투왕조가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화북지역으로 내려와 거주하다가 반평화적인 방법으로 국가를 건립하고, 이후 수 세대가 지나면서 국가가 멸망하자 중국의 문화에 흡수‧동화되어 버린 것과는 달리, 정복왕조는 장성 이북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해 중국을 일시적으로 정복했다.

따라서 10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정복왕조는 중국의 농경문화에 대항하는 유목민족으로서의 강렬한 문화적 자의식과 서방의 영향을 받은 독자적인 고도의 유목도성문화를 기반으로 해, 중국인과 중국의 문화에 대한 정복자로서의 의식이 강했다. 따라서 이들 정복왕조에서는 한민족 혹은 한문화에 동화되지 않기 위한 여러 제도적 장치들을 시행함으로써, 당연 통치구조에서도 이중성 혹은 이원성의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225)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11일 목요일

서양 근현대 역사학의 변천과정

19세기 이전의 역사는 체계적인 학문이라기 보다는 문학의 분파로 취급되었다. 역사는 사회의 상류층의 취미나 교훈을 위해 배우는 것이었다. 19세기에 이르러 랑케 사학이 만들어지면서 역사학은 학문적 체계화를 갖추게 되었다. 랑케 사학은 실증주의, 객관주의, 과거주의, 절대주의, 진보주의 등의 특징을 지닌다. "사료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는 말로 대표되는 실증주의는 역사가 객관적 사료에 의해 쓰여져야 한다는 뜻이다. 객관주의는 역사가가 자신의 주관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서술할 것을 강조한다. 역사가의 임무는 사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과거주의란 역사가 과거에 있었던 것을 그래도 재구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절대주의는 역사적 진실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랑케 사학의 또다른 특징인 진보주의 역사를 계속 진보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랑케 사학은 사건 지향적 정치사를 역사 서술의 중심으로 삼았고, 그 서술 형식은 이야기체이다.

20세기에 들어 사회과학이 발달하면서 역사학에 새로운 흐름이 일어났다. 바로 사회과학적 역사학이다. 이는 랑케 사학의 방법론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20세기에 새롭게 발전한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역사학에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개별적 사건보다 과정, 구조를 밝히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랑케의 방법론은 하나씩 비판받기 시작했다. 객관주의와 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상대주의가 나타났다. 이는 객관적 진실의 존재를 부정한다. 즉 관점에 따라 진실은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는 뜻이다. 과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현재주의도 나타났는데, 이는 역사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의미있는 역사여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랑케의 정치사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 것이 사회사이다. 사회사는 정치사 중심의 역사연구를 지양하고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여러 분야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전체사를 지향한 한 것이다. 사회과학적 역사는 사회과학의 개념 규정이나 정의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야기체 역사서술 방식을 비판하고 역사를 법칙화, 유형화하여 분석하는 서술방식을 취하였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사회발전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면서 역사학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한 움직임의 대표적인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사회에서 형성된 인류사회의 발전에 대한 믿음을 부정한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도 부정되고 근대사회를 이끌어왔던 거대담론 또한 부정된다. 거대담론은 인류의 역사를 거대한 이론이나 설명틀에 맞추어 총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학문 흐름으로, 역사를 법칙적, 구조적으로 보기 때문에 개별 인간은 그 속에서 소멸해 버린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를 과학보다 문학으로 바라보며, 역사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텍스트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이에 따라 역사를 있는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비판적으로 읽게 한다. 또한 역사를 문학의 영역으로 복권하였으므로 서술방식 또한 이야기체를 부활시켰다.

신문화사 또한 새로운 흐름이다. 신문화사는 사회과학적 역사학의 거대담론에 대항하여 개별인간의 일상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기존 역사와는 다른 맥락에서, 사회적 약자의 시각에서 서술하고, 부족한 사료를 보완하기 위하여 미시사적 접근방법을 사용한다.

-- 도그마™: 역사교육론 중간시험 --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나말여초의 사회변동 (한국 중세사회의 성립)

936년 高麗에 의한 後三國의 통일은 新羅 末期의 극심한 혼란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다는 측면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성격을 그 이전과는 다르게 본질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이른바 한국의 古代社會가 끝나고 中世社會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와 중세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나말여초의 移行期를 거쳐 우리 사회가 어떠한 모습으로 바뀌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역사를 구분함에 있어 고대와 중세를 나누는 기준은 생산관계, 중앙과 지방의 권력관계, 그리고 身分制,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등이 있다. 이러한 기준으로 고대사회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대사회의 지배방식은 토지를 매개로 한 것이 아니라 피지배민에 대한 직접지배방식을 취한다. 즉 奴隸所有主와 奴隸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직접지배 방식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의 안정적 재생산의 어려움으로 인해, 노동력 확보를 위한 전쟁이 필수적이다. 世界史的으로 고대사회의 종말은 사회 안정으로 인한 노예 노동력의 고갈과 함께 일어난다.

둘째, 고대사회는 중앙과 지방의 권력 관계가 중앙집권적인 일방적 지방 지배의 행태를 띤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중앙집권의 뜻은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行政的으로 지배한다는 것은 아니며, 왕족 또는 귀족으로 대표되는 王京人의 관직 독점으로 인한 지방세력의 정치참여 소외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軍政的인 지배를 말한다.

셋째, 고대사회는 신분제적 면에서 볼 때,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닫힌 사회이다. 개인의 신분은 관직이 아니라 혈통에 의해 결정되며, 이러한 혈통은 개인의 능력에 따른 成就지위의 획득을 원천적으로 배제시킨다.

韓國史에서 고대사회로 분류되는 신라는 위에서 살펴본 고대국가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신라 사회는 骨品制로 표현되는 폐쇄적 신분 사회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절대적 차별을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였다. 6세기 초에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왕경인을 편제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골품제는 통일전쟁 시기까지 신라의 지배세력을 내부적으로 강하게 결집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통일전쟁으로 새롭게 확보된 대동강 이남까지의 권역은 이러한 골품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의 정세가 급속히 안정되고, 평화의 시기가 지속되면서 골품제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 토지, 노비 등의 사회적 기반은 정체되어 있음에 반하여, 眞骨 귀족의 수적 증가로 인해 지배계층이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면서, 귀족간의 분열과 경쟁이 심화된 것이다. 통일 후 武烈王系의 전제정치 하에 일시적으로 귀족의 경제적 기반인 祿邑을 폐지하고 官僚田을 운영하였으나, 中代 末 귀족들의 토지집적과 자연재해로 인한 소농의 몰락으로 국가재정이 궁핍해지면서 귀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다시 녹읍을 부활시켰다. 귀족들 간의 경제적 경쟁은 정치적 혼란, 즉 왕위쟁탈전으로 이어지고, 또 한편으로 귀족의 수탈 강화는 농민 流亡으로 이어져 잔류민의 부담이 더욱 늘어나는 등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에 신라의 지배계층은 律令의 개정을 통해 집권체제를 정비하고, 近侍機構를 강화하고 文翰機構를 통합하는 등의 왕권강화를 시도하였으나, 기득권을 양보하지 않는 귀족들의 미온적 태도로 실패하고 말았으며, 이로 인해 신라의 구조적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모순은 필연적으로 생산계급인 농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眞聖王 3년(889)을 고비로 농민의 저항은 기존의 소극적인 소규모 저항을 벗어나, 적극적이고 대규모로 조직된 농민군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농민항쟁은 이후 불합리한 收聚制度 개선에 대한 단초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농민항쟁은 후삼국의 각축전이 전개되자 점차 소멸되는 양상을 보이며, 이로써 변혁운동의 주도권이 군사력을 가진 城主 ‧ 장군 등의 유력 지방세력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른바 豪族이라 불리는 지방세력은 신라 통치제제가 붕괴되면서,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내륙의 지주층에서 성장하거나, 軍鎭에서도 나타났으며, 바다를 이용한 국제무역 종사 계층에서도 성장했다. 이들에게 신라 골품제의 가장 큰 불만 세력이며, 唐으로 유학하여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돌아온 6두품 출신의 지식인층이 가담하여 참모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중국에서 들어온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 등도 호족의 경쟁 관계와 맞물려 크게 유행하였다. 예언과 비기로 이루어진 도참사상은 민간에 퍼진 미륵신앙과 함께 경주와 신라 지배계층의 권위를 무너뜨리며 새로운 사회를 여는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이렇게 난립하던 호족 중에서, 세력을 크게 이루어 후삼국시대를 연 세력은 甄萱과 弓裔, 그리고 궁예를 이은 王建이었다. 이들은 출신 배경과 對신라 정책에 따라 서로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통일 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과, 혼인과 정복을 통해 주변의 군소 지방세력을 포섭 ‧ 흡수해가는 통일정책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었다. 왕위계승 문제로 발생한 내분으로 몰락한 견훤과, 전제주의로 인한 반대세력과의 마찰로 멸망한 궁예와 달리, 왕건은 적극적인 親신라 정책과 호족들을 아우르는 정책을 펼쳐, 마침내 935년 후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였다.

고려의 통일은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닌, 사회 성격이 바뀌는 일대 사건이었다. 고려 사회는 이전 신라 사회와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고려는 田柴科로 대표되는 負稅制度의 개혁을 통해, 사람에 대한 직접 지배방식에서 토지를 매개로 한 간접지배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제 최소한 명목적으로는 토지가 귀족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관료에게 지급되는 급료의 형태를 취한다. 景宗 1년(976)에 始定田柴科과의 시행으로 시작하여 문종 30년(1076)에 更正田柴科로 일단락된 부세제도를 통해 중세적 토지제도가 성립되었다.

둘째, 삼국에서 통일신라까지의 고대사회에서 중앙과 지방의 관계가 정복과 복속의 개념이었던 것에 비해, 고려는 지방세력의 자치에 바탕을 둔 타협적 지배방식을 택했다. 군사 요충지 외에는 지방에 상비군을 두지 않고 官人인 파견하여, 鄕吏의 지방자치를 감독하였다. 太祖 왕건은 지방세력을 포섭하고 왕실 권위를 提高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결혼정책을 펼쳤으며, 호족의 해당 지역에서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한편 그들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事審과 其人제도를 함께 시행하였다.

셋째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없었던 신라와 달리, 고려는 외형적으로는 官職의 승진에 제한이 없는 개방적 사회였다. 宗親不仕 원칙 아래 王族의 정치 참여를 배제시키고 王室內婚을 통한 凡人과의 단절을 통해, 왕은 초월적 존재가 되었다. 동시에 정치는 관료가 맡는 정치체제를 도입하였다. 唐의 제도를 수용하여 敎育과 科擧를 통한 경쟁의 제도화를 통하여, 혈통으로 결정되는 歸屬지위를 최대한 배제하여 성취 동기를 고양하고, 또한 불완전하게나마 지역차별을 해소함으로써 신분의 유동성을 확보하였다. 지방의 호족은 점차 분화되어,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인층이 되거나 자신의 거점에서 지방의 지배층, 즉 향리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고려의 체제정비는 成宗代에 유교적 정치질서를 강화함으로써 완성된다. 성종은 光宗의 호족 억압책으로 소외되었던 세력까지 포용하고, 전시과를 통한 중세 토지제도의 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신라 6두품 출신의 崔承老를 등용하여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 체제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로써 유교는 治國의 정치이념으로, 불교는 修身의 종교로 자리매김하여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었다. 이리하여 성종 이후 체제가 정비된 고려사회를 중세사회라 부른다.

-- 도그마™: 한국중세사 중간시험 --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시황제와 분서갱유

이러한 법가적 통치정책은 더 나아가 역사상 악명 높은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일컬어지는 사상의 통일로 발전했다. 분서란 서적을 불태워버린 것을 말하며 갱유란 자신의 통치이념에 반대하는 학자를 땅 속에 묻어 죽인 것을 이른다. 학자 중에는 진의 획일적인 법치에 불만을 품고 옛 것을 찬미하며 시황제의 정치를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B.C. 213년에 이사李斯의 건의에 따라 진의 역사서와 의약, 점복과 농업관계 이외의 서적을 몰수해 30일 내에 소각했다. 그리고 고서古書에 대해 논의하는 자는 사형, 옛 것을 찬미하고 진을 비방하는 자는 일족 전체를 죽인다는 금령을 내렸다. 이 분서령은 이미 상앙商鞅의 변법을 통해 진국 내에서 실시되던 것인데, 이를 전국으로 확대한 것이다. 그 목적은 민간 소장의 서적과 사학私學을 금지하고 그것을 관이 소장하며 관학으로 일원화하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분서령이 반포된 이후에도 수도 함양에는 여전히 유가의 경전이 소장되고 있었으며, 박사들에 의해 정리‧연구되고 있었다.

다음으로 갱유는 시황제의 신선술에의 동경이 그 계기가 되었다. 분서의 다음 해에 자신을 속인 방사方士 노생盧生에 대한 화풀이로 유학자를 포함한 460여 명의 학자들을 함양에서 파묻어 죽였는데, 이것은 학자와 학문에 대한 탄압책의 대표적인 사례였으며 후세에 시황제를 비난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p.73-74)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맑스주의 역사학의 성과와 한계, 그리고 역사의 민주화

헤로도투스 이후 서양의 역사는 왕과 영웅의 역사였고, 정치 중심의 역사, 승리자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또한 역사 서술상의 특징은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 행위 주체의 의지만이 강조되었다. 맑스주의 역사학은 역사의 변화 발전의 동력을 토대와 상부구조 간의 갈등으로 보았으며, 그러므로 역사 속의 주체의 행위는 그가 속한 물질적 토대의 규정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였다. 때문에 맑스주의 역사학은 역사학의 주된 관심을 사회 경제적인 토대에 대한 탐구로 돌렸으며, 사회를 변화‧발전시키는 갈등, 즉 계급 투쟁과 계급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를 강조하였다. 또한 역사적 인과관계를 개인의 성향의 결과가 아닌 사회를 관통하는 법칙 속에서 찾으려 하였기 때문에, 역사학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론화 작업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맑스주의 역사학은 현실에 대한 법칙적‧관념적 접근으로 인하여, "전체적인 설명에는 성공하였으나 구체적 사건의 설명에는 실패한 역사", "노동계급을 위한 역사에 노동계급은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역사"를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맑스주의 역사학이 주목한 '지배계급 중심의 역사로부터의 탈피'는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이다. 맑스주의 역사학은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 즉 계급이라는 범주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시각에서 본 역사를 발굴해서, 정말로 역사의 하위 주체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모델들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 도그마™ --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역사학의 본질과 E.H. Carr의 의의와 한계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역사가가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었고,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그러나 역사를 '있는 그대로'라고 할 때, 인류가 살아온 모든 시간과 모든 개개인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와 평가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E.H. Carr는 이것을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정의하였다.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서술되는데, 그 출발점은 언제나 역사가의 현재 문제의식에 있다는 것이다. 역사가의 문제의식에 따라 동일한 역사적 사건도 다르게 해석되며, 선택되는 사료도 달라진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당파성이라고 말했는데, Carr가 역사학에서 가지는 의미는, 모든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객관적인 역사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역사는 당파적이며, 과거라는 실재에 대한 현재적 의미라는 것을 밝혔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Carr의 역사는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바라보는 역사, 언어로서의 역사는 아니었다. Carr는 역사의 진보를 믿는 근대주의자였으며, 따라서 역사가 일관된 흐름 속에서 발전해 간다고 믿었다. 이러한 Carr의 생각은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목적론적 역사관과 다를 바 없으며, 진보라는 거대 담론 위에서만 역사를 서술하기 때문에, 다양한 삶을 담아낼 수 없었다는 한계가 있다.

-- 도그마™ --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한국전쟁과 스탈린

스탈린은 전쟁의 최종 결정권자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시아‧북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고, 동유럽에 집중해 있었다. 1949년 말 이래 아시아에서는 스탈린이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 정책을 결정한다는 소련-중국간 권위의 이양‧서열화가 이뤄졌다. 때문에 1949년 3월과 1950년 4월 김일성‧박헌영의 모스크바 방문시 스탈린의 전쟁 결정은 미국의 전쟁 불개입에 대한 보증, 북한군의 병력‧화력 우위 보증, 모택동의 원조 보증이라는 전제조건이 충족된 뒤에야 이뤄질 수 있었다. 스탈린은 전쟁에 소련이 개입한 것을 위장하는 데 주력했고, 군사 고문단의 38선 이남 월경조차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 그렇지만 소련은 개전 초기 북한군 편제‧무장‧훈련은 물론 작전계획 수립에 이르기까지 북한국의 본질적 근원이었다.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下, p.400)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골품제 하의 지방민

신라사회를 규정하는 원리는 골품제였다. 이에 따르면 골품에 따라 정치적‧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에 차등이 있었다. ...... 결국 정부의 중요 관부와 장관(令)이나 장군과 같은 군 지휘관은 진골만이 맡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골품제의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왕경인(王京人)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비록 평민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골품제에 편입된 사람들의 지위는 지방의 유력자보다 우월하였다. 물론 지방 지배를 위해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관등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왕경인에게 수여되는 경위(京位)와는 별도의 외위(外位)를 주었다. 7세기에 들어서는 경위가 수여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중앙정부에 진출하여 관리가 된 예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지방 유력자들은 골품을 지니지 못하였고 다만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을 뿐이다.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pp.188-189)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기독교의 공인

"기독교인을 비롯한 모든 인민에 대하여, 누구든 마음대로 어떤 종교라도 선택하여 따를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다." (콘스탄티누스, 313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공인될 당시의 기독교는 흔히 알려진 바와는 달리 박해를 피해 지하에 숨어사는 몇몇 사람들이 믿던 종교가 아니라 전 로마 인구의 10% 이상을 신자로 거느린 종교로 성장해 있었다. 기독교 교회는 주교를 정점으로 사제 및 부제로 이루어진 계서제적 조직을 통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주교는 성직자와 주민의 동의를 받아 선출된 후 이웃 교구 주교의 축성을 받아 주교 자리에 올랐는데, 일단 주교가 되면 죽어 은퇴할 때까지 로마의 행정구역인 도서의 거의 일치하는 그의 교구 내에서 절대 군주와 다름없는 권한을 행사하였다. 그는 사제의 서품이나 세례 혹은 파문과 같은 종교적인 권한뿐 아니라 교구의 재정권 등 세속적인 권한까지도 행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단순히 전쟁에서의 승리에 대한 보답으로서가 아니라 기독교 교회가 가진 현실적 능력과 가능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

... 기독교 사제 집단은 제국의 통치 기구 및 관료 조직이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거나 축소되고 있을 때 비약적으로 팽창하였다. 따라서 4세기 말 이후 제국이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다시금 혼란고 위기에 빠지면서 통치 조직이 붕괴되고 서유럽에 게르만족 왕국이 들어서게 되었을 때, 기독교 교회와 주교가 로마인들의 대변자요 로마 문명의 수호자가 될 수 있었다.

(서양사강의, pp.102-104)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로마의 시민권 정책

신분 투쟁 이후 약 1세기 반 동안 로마가 밖으로 눈부신 군사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정치적 욕구가 충족된 유산 시민층이 발휘한 유례없는 일체감과 애국심이었다. ...... 그러나 대외적 성공의 원천으로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이탈리아의 통일 과정에서 로마가 취했던 독특한 시민권 정책이었다. 독특했다는 것은 시민권에 대해 극히 배타적이었던 그리스 폴리스들과 달리, 로마는 개방적이고 탄력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로마는 정복 혹은 합병된 지역의 주민들에게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완전 시민, 준(準)시민, 동맹 시민 등 차등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시민단 자체를 확장함은 물론 시민단 밖에 중층적 외연 구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 외연 구조는 끊임없는 전쟁에의 부담을 안고 있던 로마에 두 가지 이점을 제공했다. 첫째, 강압적 지배에 뒤따랐을 긴장 관계 대신 오히려 종속 공동체들의 로마에의 구심적 경향이랄까 동화주의를 조성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 둘째, 로마에 인력의 증강이라는 군사적 이점을 제공했다. ...... 요컨데 이 시민권 정책은 인력 조달 및 지배의 부담을 수반하는 공동체의 확장과 도시 공동체의 배타적 본성 사이의 긴장을 조성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고안물이었다고 할 것이다.

(서양사강의, pp.71-72)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포에니 전쟁

이(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은 어찌 보면 그리스 세계와 오리엔트 세계의 대결의 연장이라는 흥미로운 일면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카르타고가 해상 교역 활동 및 알파벳의 발명으로 유명한 페니키아인들이 기원전 8~6세기에 지중해 서부 지역에 세운 식민지들의 맹주 격이었다면--그래서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가리켜 포에니(Poeni), 즉 페니키아인들이라고 불렀다--, 로마는 직‧간접적으로 그리스적 문화와 제도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해 온, 말하자면 그리스적 색체가 농후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대결(특히 3세기 말의 한니발 전쟁)에서의 승리로 로마는 갑자기 지중해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거의 필연적으로 동지중해의 헬레니즘 세계 강대국들과 일련의 긴장과 갈등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 즉 로마는 정치‧문화적으로 선진적인 헬레니즘 국가들에 대해 그동안 취해온 방어적 제국주의 내지 패권주의의 방침을 버리고, 보다 직접적인 지배로 전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로마의 지배를 직접적으로 관철시킨다는 것은 바로 그 국가들의 속령화를 의미했으며, 그 과정은 기원전 30년 로마가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마지막 남은 헬레니즘 세계의 강국 이집트를 속주로 편입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서양사강의, pp.23-25)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9일 화요일

프랑스의 절대왕권

프랑스 절대왕권이 특히 강력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기반은 무엇보다도 농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력에 있었다. 국왕은 지방 귀족이 농민을 지배하는 것을 막고, 그 대신에 타유(taille)세나 인두세를 농민에게 부과함으로써 농민의 잉여를 직접 빼앗았다. 프랑스 절대 군주들은 봉건영주를 궁정 귀족으로 만드는 한편, 관직 매매, 징세 청부, 공채 등의 방식을 이용하여 왕실의 재정을 확충했다. 절대 군주들은 이 과정에서 대(大)부르주아를 지배 체제의 일원으로 편입했으며 그와 함께 그들의 부를 국가로 끌어들였다. 이 때문에 적극적인 중상주의 정책이 시행되었음에도 부르주아의 부는 생산적인 자본 투자보다는 오히려 신분 상승과 낭비적 소비의 길로 나아가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서양사강의, p.243)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문화 보수주의

(서양의 물질적 우위와 동양의 정신적 우위를 대비한 뒤 그 대안으로 동양정신을 강조한) 문화 보수주의는 인도와 중국을 중심으로 타고르와 간디, 량수밍 등에서 보듯 당시 아시아 각국에서 등장하여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새삼 확인해주면서 (반)식민지의 민족주의 정서에도 호응하는 기능을 담당했고, 최근에 '아시아적 가치론'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정신적 아시아론'은 앞서 살펴본 대로, 물질적 우위의 서양이란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고 그 전에는 오히려 동양이 물질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 당대 인도의 역사가인 사르카르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아시아인과 유럽인은 모두 물질적인 동시에 정신적이다. 둘 사이의 차이라고 주장되는 것은 산업혁명에 따라 인류의 일부가 놀라운 성공을 거둔 후 처음 이야기되기 시작했으며, ......" 19~20세기 서양의 물질적 위세에 눌리던 아시아인은 그 위기의 상황에서 만들어진 '물질적 서양론'이란 시각으로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하면서 정신적 위안의 도피처를 찾으려 한 것이다. ...... 결국 자기 오리엔탈리즘으로 연결되고 마는 이러한 문화 보수주의 역시 유럽 중심주의에서 진정으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역사교육과 역사인식, pp.366-367)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다문화주의의 문제점

서유럽을 축으로 한 세계 역사의 수렴적 발전 또는 통일성(unity)에 대한 대안은 다문화주의로 대변된다. ...... 이러한 다원주의적 관점에서는 문명의 개념을 국가-민족이 아닌 지역적 문화 단위로 정하고, 관점의 공평함과 균형을 추구한다. ......

그러나 '문화의 다양성' 담론은 저항의 언어로 유용해 보이지만, '문화의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경계'를 만들어내는 또 다른 패권주의적 정치성을 띠고 있다. 원래 '동양' 또는 '동아시아'의 동질성은 서구인들이 만든 허구인데, 이제 동양인들 스스로가 우월함으로 장식된 신비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합일, 상생의 힘으로서의 상극, 유기체적 우주관 등이 이 담론의 주요 내용이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동질적인 '하나'의 '유럽'이 존재한 적이 없는 것처럼 단일한 '동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 '동양' 또는 '동아시아'라는 개념은 '유럽'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지리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서구의 대안이 아니라 그 아류로 등장한 것이다.

(역사교육과 역사인식, pp.434-435)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8일 월요일

스콜라철학과 보편논쟁

스콜라철학자들이 당면한 첫번째 문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었으며, 이 문제는 스콜라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는 문제에 관련된 것이었다. ...

이와 관련된 두번째 문제는 이른바 '普遍'(the universals)의 문제였다. 이는 12세기 초에 대두된 중요한 철학적 과제로서 보편적인 개념의 實在(real existence)를 주장하는 實在論(realism)과 보편적인 것은 오직 이름뿐이고 실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唯名論(nominalism)과의 대립을 불러일으키고, 양자간에 '普遍論爭'이 벌어졌다. 이 문제에 타당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은 에로이즈(Heloise)와의 사랑으로도 유명한 12세기 전반기의 파리학계의 거장이었던 아벨라르(Peter Abelard, 1079~1142)였다. 아벨라르는 보편적인 것은 실재하지만 그것에 내재하는 개별적인 것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개별적인 것과 별개로 파악된 보편적인 개념은 인간지성의 추상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14세기 초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서양사개론, pp.233-234)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술 한 병쯤 언제나 마셔대는 아름답기 그지 없는 여인

봉건 계급의 여성은 남성과 함께 몇몇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다. 설교가나 이야깃꾼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여자들도 수시로 즐겨 과음하였다. 사실, 그 당시의 이야기에서 "술 한 병쯤 언제나 마셔대는 아름답기 그지 없는 여인"이란 묘사가 곧잘 나온다. 그네들은 하녀를 때로는 죽을 때까지 마구 때렸다. 물론, 그네들의 일상 생활은 그보다는 덜 폭력적이었다. 그네들의 일은 대개 실잣기, 천짜기, 바느질, 그리고 가정일의 감독이었다. ......

여자는 전투 능력이 없었으므로, 초기 봉건 관습에 의해 언제나 미성년자(minor)로 취급되었다. 여자는 언제나 남자의 보호 아래 있었다. ...... 교회는 남편이 아내를 구타할 때 쓰는 몽둥이의 크기를 제한함으로써 아내에 대한 폭력을 줄여보려고 하였지만, 교회의 가르침이 여성의 지위를 개선시키지는 못했다.

(서양중세사, p.169)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메스타와 모리스코, 그리고 에스파냐의 농업

에스파냐에서는 재정복에 의한 국가건설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서유럽적인 봉건제나 장원제도가 성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농민에게 유리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불리하였다. 토지는 귀족과 교회에 집중되고, 세금과 귀족에 대한 공납으로 농민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거대한 移動牧羊者組合인 메스타(Mesta)의 특권과 횡포였다. 春秋로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이동하는 양떼와 그것에 주어진 특권으로 농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왕실재정의 주된 원천인 메스타 앞에 농업이 재물로 바쳐진 것이다. 편협한 종교정책으로 17세기 초에 취해진 이슬람계 원주민인 모리스코(Morisco)의 추방 또한 그 수는 약 30만 정도였으나, 그들이 농민엘리트라고 할 정도로 우수한 농업기술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농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서양사개론, p.337)

Posted via web from monpetit's posterous

풍수도참설과 한양명당설

풍수도참설이란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이 결합한 것인데, 불교와 관련한 비보사탑설과, 국도의 선정과 관련한 지덕쇠왕설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지덕쇠왕과 관련한 국도 논의는 정치세력의 등장, 갈등과 연결되어 전개되었다.

...

(고려) 문종대를 전후한 시기부터 한양이 좋은 땅이라는 '한양명당설'이 널리 퍼졌다. 한강 연안의 중부지방이 정치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한양 천도설이 나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주창에 따라 문종대에 지금의 서울을 남경으로 승격시켰으며, 숙종대에는 남경에 궁궐을 짓고, 국왕이 몇 달씩 머물다 가기도 하였다.

-- 이병희, <불교와 유교, 풍수도참>, 아래의 책, pp.274-275 --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2010년 3월 7일 일요일

양천제와 반상제

양천제는 조선 초기 국역체계의 운영을 목적으로 기능했던 일종의 '국가적 신분규범'이었다. 양천제 자체에는 어떤 계층에 대하여 특권을 부여하거나, 그들의 지위를 확인해 주는 어떠한 법적 규정이 없었다. 국가는 국역 부담 유무를 기준으로 모든 계층을 파악했을 뿐이며, 국역체졔의 운영이라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양천제의 기능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반상제는 사족층이 성장하고 그들의 주도하는 사회구조가 확립되었을 때 모습을 드러낸 '사회적 신분규범'이었다. 따라서 반상제의 성립 과정에서 국가가 개입할 여지는 크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는 새로운 법률을 제정할 의지도, 그리고 사문화한 이전의 법률 규정들을 폐지할 의지도 없었다. ...... 따라서 '체형과 군역 면제권', '문무반 관직 독점권'과 같은 양반층의 여러 특권은 양반층과 비양반층(상민층)을 분리하는 사회관습적 계선으로만 존재했다. 공상층(工商層)은 과거 응시가 불허되거나, 양반층은 공상(工商)의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양천제 아래의 여러 규정도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았다.

-- 김성우, 아래의 책, p.465 --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

양반의 군역 면제권

양반층의 사회적 지위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층 굳어졌다. ...... 이들은 전후 복구사업을 주도하면서 그들의 위상을 다시 한번 공고히 해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양반층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영속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새로운 사회질서 구축에 골몰했다. 이와 관련하여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이 '군역 면제권' 획득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격앙된 양반층의 반발에 부딪치곤 했던 국가는 정묘호란을 눈앞에 둔 1627년(인조 5년) 사족충군정책(士族充軍政策)을 공식적으로 폐기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양반이라면 당연히 '군역 면제 특권'을 누린다는 신분상의 특례조처는 이때 이후 발효된 것이다.

-- 김성우, <사회 신분>,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上>>, 지식산업사, 2008, pp.460-461 --

Posted via email from Historian's Worksh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