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7일 수요일

백제 개로왕의 국서

延興二年 其王餘慶始遣使上表イ曰 臣與高句麗源出夫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輕廢隣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須整旅電邁 應機馳擊矢石暫交梟斬釗首 自爾以來 莫敢南顧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强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是滅亡之期 假手之秋也 且高麗不義 逆詐非一或南通劉氏或北 約蠕蠕 共相脣齒 謀凌王略

연흥(延興) 2년(472) 그 나라 임금 여경(餘慶-개로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고 표(表)를 올렸다. ... 가로되 신(臣)과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윗대 때는 옛 정을 두터이 여겼지만 그 할아비 쇠(釗)는 이웃 간에 우호(友好)를 가벼이 던져버렸습니다. 쇠(釗, 고국원왕)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제 땅으로 넘어 오자, 신(臣)의 할아버지 수(須, 近仇首王)가 군대를 가지런히 한 다음 벼락처럼 달려갔습니다. 틈을 보다가 한숨에 달려가 치니 화살과 돌이 잠깐 동안 어지러이 날아다녔습니다. 드디어 쇠(釗) 머리를 베어 높이 매다니 그때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습니다. ... 지금 련(璉, 장수왕)이 죄를 지어 나라는 아주 엉망이 됐고 대신(大臣)과 큰 가문들은 죽음을 당해 모두 사라질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죄와 악이 차고 쌓여 백성이 허물어지고 흩어졌습니다. 지금이 바로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요, 남 손을 빌릴 때입니다. ... 또 고려(高麗)는 의롭지 못한 나라여서 천명을 거스르고 사람을 속인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가끔 남쪽으로는 유씨(劉氏, 송나라)와 사신을 주고 받고, 또 북쪽으로는 유유(蠕蠕)와 동맹을 맺습니다. ... 고구려가 송(宋), 유유(蠕蠕)와 서로 입술과 이빨 같은 관계를 맺고 (북위) 임금님 땅을 침범하려는 잔꾀를 부리고 있습니다.

[위서(魏書) 卷 100 열전(列傳) 88, 百濟 개로왕(蓋鹵王, 제21대 王, 재위 455-475) 기사]

 

臣與高句麗源出夫餘

  •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夫餘에서 나왔다. 『위서魏書』 [뿌샘, p.145]
  • 백제의 선조는 고구려국 출신이다. 『수서』권 81, 「동이열전」, 백제 [뿌샘, p.145]
  •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하였다(기원전 37).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p.37]
  • 백제는 고구려 주몽의 아들로 알려진 온조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의 하남 위례성에 정착한 후 마한 소국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p.47]
  • 백제국을 세운 온조집단은 부여족 계통으로서 고구려에서 이동해 와서 한강유역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부여족의 전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부여씨를 칭하였다. 이 점은 한강유역에 고구려 계통의 돌무지 무덤이 존재하고 있다든가,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다”(臣與高句麗源出夫餘)고 한 사실-『위서』백제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길사 한국사, p.3, p.31]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强族 戮殺無已

  • 장수왕 63년(475) 9월에 왕이 군사 30,000을 이끌고 백제에 침입하여, 백제왕의 도읍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백제왕 부여경夫餘慶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6 [뿌샘 1권, p.235]
  • 고구려는 6세기에 이르러 안장왕이 피살되고(531), 안원왕(531~545) 말년에는 귀족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대립과 싸움이 일어나 내부 분란에 빠졌다. 장수왕이 79년이나 장기 집권하면서 지배 세력이 바뀌지 않아 생긴 여파였다. 내정이 어지러워지면서 국력은 약해졌고,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잃었다. ... 고구려가 내부 분란을 수습하고 왕권의 안정을 되찾은 것은 평원왕(559~590)대였다. [뿌샘 1권, p.255]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북위에 사신을 보내었으나 동맹을 맺는데 실패

  •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427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남진 정책을 더욱 밀고 나갔다. ... 고구려의 침략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은 백제였다. 이에 백제는 472년(개로왕 18) 중국의 북위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청하였으나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고구려는 475년(장수왕 63) 3만의 대군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붙잡아 죽이니 이에 백제는 서울을 남쪽의 웅진熊津으로 옮기게 되었다. ...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의한 한성 함락과 웅진 남천은 백제에게 커다란 시련을 안겨준 것으로 무엇보다도 한강 유역의 상실은 백제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왕권의 실추와 眞氏·解氏 등 왕비족의 창궐은 백제의 내부적 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이 때부터 백제는 다난한 시기를 겪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백제의 부흥을 꾀한 이는 동성왕(479~501)이었다. 그는 신라의 왕족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침략에 대한 백제·신라의 동맹관계를 굳게 하고 또 종래의 외척세력을 배제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려는 의도에서였다. ... 이때 백제의 국력이 내외로 크게 신장되고 있었음은 무령왕(501~523)이 중국 남조의 양梁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강화하고 양으로부터 寧東大將軍의 관작을 받은 것에서 엿볼 수 있다. [한국사통론, pp.85-86]

 

고구려의 대중국정책

  • 고구려는 중국세력과의 대립을 통하여 더욱 국세를 신장시켰다. 동천왕(227~248)은 중국이 위魏·촉蜀·오吳 삼국으로 분립하자 이들의 대립관계를 이용하여 오와 친교를 맺었고 왕 16년(242)에는 중국과 낙랑을 연결하는 서안평을 공격하였다가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오히려 수도까지 함락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천왕(300~331)은 그 뒤 중국이 북방민족들의 침입을 받아 5호 16국의 혼란기로 접어들게 되자 끝내 서안평을 점령하였고, 이어 낙랑군을 공략하여 우리 나라 안의 중국세력을 완전히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313). [한국사통론, p.77]
  • 평양천도 후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와 두루 교통하여 그의 압력을 배제하면서 남하정책을 강행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장수왕 21년(433)에 백제와 신라가 동맹관계를 맺은 것은 이러한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한국사통론,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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