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30일 화요일

서임권 투쟁의 결과

20여 년에 걸친 투쟁 끝에, 교황과 황제의 양 진영에서 온건한 사람들이 진지하게 타협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기본적인 관심은 세속적인 지배자가 성직을 부여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 왕들의 기본적인 관심은 세속적인 지배권을 겸비하게 될 주교들로 하여금 그들의 세속권이 왕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케 하는 데 있었다. ... 1107년에 캔터베리의 성 안젤름과 헨리 1세(Herry I)는 영국에서의 타협안을 마련하였고, 이는 뒤이어 교황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에 따르면 주교는 우선 교회법에 따라 선출된 다음, 봉신으로서 왕에게 臣誓를 하고 왕으로부터 봉토와 직책에 따른 세속 사법권을 받고 나서야 주교로 축성되도록 되어 있었다. ...

서임권 투쟁을 종결시킨 이른바 보름스 화의(the Concordat of Worms)라 불리는 타협은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 2세(Calixtus II; 1119-1124) 사이에서 1122년에 이루어졌다. 그 타협안은 독일의 경우 왕이 주교를 선출하는 자리에 참석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영국에서의 타협안과 비슷했다.

왕들은 ... 실제로는 여전히 주교를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나치게 부적격한 인물을 성직에 임명하기는 훨씬 더 어려워졌다. ... 분명히 12세기에는 성직 임명의 기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서임권 투쟁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왕의 神政政治가 서구 세계의 통상적인 정치형태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저지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써 교황의 神政政治가 대두한 것은 아니었다. 교황이 왕을 폐위할 수 있다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주장은 왕들에게 전혀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기껏해야 매우 논쟁의 여지가 많은 주장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 투쟁의 결과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권력을 남용한 통치자에 대한 저항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론이 태동하였다는 것이었다. ...

독일 전역에서 제후들은 (왕권에 맞서) 그들의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 봉건제가 독일 전역에 확산되었다. ...

교황은 투쟁을 통해 권위를 크게 높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정치적 요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종교적 문제에 관한 한 기독교 세계의 최고 지배자로서의 교황의 지위는 강력하게 재천명되어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

(서양중세사, pp.234-237)

Posted via web from Historian's Work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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