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와 사림의 대립에 대하여 이들을 서로 다른 사회계층으로 간주하고, 그 연원을 고려 말로 소급해서 추적하면서, 사림 세력이 15세기 내내 중앙 정부의 집권력 강화에 저항해 왔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리하여 사림 세력이 거듭되는 사화에도 불구하고 선조대 정계를 장악한 것을 '지배세력의 교체'로 간주하고 '성리학(性理學)'과 '중소지주의 승리'라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강력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중종대 이후의 소위 '사림' 세력 가운데는 이전의 '훈구' 세력의 후예가 많고 경제적 기반도 대지주 출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실증적 성과에 기초한 것이다. 따라서 '훈구'에서 '사림'으로 '지배세력'이 '교체'되었다는 통설은 제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이 자신의 경제적 기반과는 별도로 중소지주적 지향을 강하게 내보였고, 특히 사상적으로 성리학 내지 주자학 정치사상을 더 철저하게 구현하려는 정치세력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 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문제는 왜 15세기 말이 되어서야 '사림'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였나는 점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당시의 농업 생산력 발전 단계와 함께 수조권(收租權) 분급제의 소멸과 지주제의 전면적 부상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는 추론이 나오고 있다.
사림 세력의 등장과 함께 언론 삼사의 위상이 제고되고 전조(銓曹) 낭관(郎官)의 통청권과 자대제가 확립되어 이들 부서가 명실상부한 청요직(淸要職)으로 부상한 것은 권력 구조상의 중요한 변화였다. 그리고 정치참여층이 확대되고 공론정치의 원칙이 확립된 것은 중세 정치의 발전으로 간주되었다.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上, pp.367-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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