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교회 조직을 비난하며 새로운 교리를 내세우는 이단자와 이단 조직에 대하여 정통 기독교회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특히 이들이 세속 영주에 의해서 보호되면 교회 법정은 속수무책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였는데, 옥스퍼드 신학자였던 그는 기존 교회의 교리와 정치적 기반을 공격했다. 그는 성사의 가치는 그것을 행하는 사제의 인물됨에 따르고[범법 사제 성사 거부], 영성체에서 예수는 오직 정신적으로 나타나며[화체설 공격], 면죄부는 무용한 것이고 구원은 개인적 공적보다는 신성한 예정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교회의 부와 사치를 공격하고 현세의 일에 대한 교회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위클리프의 설교는 당시 교회와 대립하던 영국의 군주와 귀족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 같은 이유로 롤라드파(Lollards)로 알려진 그의 추종자들은 헨리 5세(1413~1422) 때에 이르러서야 국가에 의해서 큰 탄압을 받았다. ... 프라하에서 위클리프 가르침의 선두 지지자는 후스(Jan Hus, 1373~1415)였는데, 그는 매우 인기 있는 젊은 사제이며 설교자로서 면죄부를 공격하고 교회의 예배 의식과 도덕률의 개정을 요구했다. ... 후스는 교회에서 파문당하고 대학의 교수 직도 박탈당했다.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하여 콘스탄스 공의회에 참석했던 후스는 거기서 이단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아 말뚝에 묶여 화형당했다. ... 16세기 종교개혁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자신도 후스의 추종자라 선언했다. 후스의 화형과 함께 종교개혁의 씨앗도 싹텄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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