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통삼한 인식은 신문왕 12년(692)에 당(唐)이 요구한 무열왕의 묘호인 '태종(太宗)'의 개칭에 대한 회답 속에 나타나고 있다.
"... 선왕 춘추도 자못 어진 덕이 있었고, 더구나 생전에 어진 신하 金庾信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에 힘써 삼한을 통일(一統三韓)하였으니, 그의 공적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 ..." [삼국사기 卷8, 신라본기8 신문왕 12년]
무열왕의 묘호로 '태종'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로 일통삼한, 즉 삼국통일의 달성이라는 공적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그러면 무열왕 때 이미 일통삼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 이렇게 보면 문무왕대 고구려를 멸한 이후 '일통삼한' 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태평에 이르지 못했다'는 김유신의 말에서 고구려의 멸망이 곧 삼국통일의 완성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문왕 6년(686)에 세워진 「청주 운천동 사적비(寺蹟碑)」 속에 '民合三韓而廣地'라는 구절이 있어 신문왕대에는 일통삼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보다 1년 전(685)에 신문왕은 백제와 고구려 옛 땅, 원신라 지역에 각각 3개의 주(州)를 두어 전국을 9주로 정비했다. 9주는 곧 천하를 의미하는 것으로 통일의식을 과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왕 7년(687)에 고구려‧백제민과 말갈인으로 조직한 9서당(誓幢)의 완비 또한 이러한 의식을 강조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일통삼한 의식은 문무왕대 당군을 축출하여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함으로써 형성되기 시작해, 이후 신문왕대에 강조되면서 신라인의 의식으로 자리잡아갔다고 하겠다. 최치원은 고구려는 마한, 백제는 변한, 신라는 진한의 계승국으로 보았는데, 이는 삼한과 삼국을 일치시켜 보는 인식이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음을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박미선, 「일연(一然)의 신라사 시기구분 인식」, 『역사와 현실 70』, pp.16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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