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6년 高麗에 의한 後三國의 통일은 新羅 末期의 극심한 혼란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다는 측면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성격을 그 이전과는 다르게 본질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이른바 한국의 古代社會가 끝나고 中世社會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와 중세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나말여초의 移行期를 거쳐 우리 사회가 어떠한 모습으로 바뀌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역사를 구분함에 있어 고대와 중세를 나누는 기준은 생산관계, 중앙과 지방의 권력관계, 그리고 身分制,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등이 있다. 이러한 기준으로 고대사회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대사회의 지배방식은 토지를 매개로 한 것이 아니라 피지배민에 대한 직접지배방식을 취한다. 즉 奴隸所有主와 奴隸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직접지배 방식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의 안정적 재생산의 어려움으로 인해, 노동력 확보를 위한 전쟁이 필수적이다. 世界史的으로 고대사회의 종말은 사회 안정으로 인한 노예 노동력의 고갈과 함께 일어난다.
둘째, 고대사회는 중앙과 지방의 권력 관계가 중앙집권적인 일방적 지방 지배의 행태를 띤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중앙집권의 뜻은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行政的으로 지배한다는 것은 아니며, 왕족 또는 귀족으로 대표되는 王京人의 관직 독점으로 인한 지방세력의 정치참여 소외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軍政的인 지배를 말한다.
셋째, 고대사회는 신분제적 면에서 볼 때,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닫힌 사회이다. 개인의 신분은 관직이 아니라 혈통에 의해 결정되며, 이러한 혈통은 개인의 능력에 따른 成就지위의 획득을 원천적으로 배제시킨다.
韓國史에서 고대사회로 분류되는 신라는 위에서 살펴본 고대국가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신라 사회는 骨品制로 표현되는 폐쇄적 신분 사회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절대적 차별을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였다. 6세기 초에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왕경인을 편제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골품제는 통일전쟁 시기까지 신라의 지배세력을 내부적으로 강하게 결집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통일전쟁으로 새롭게 확보된 대동강 이남까지의 권역은 이러한 골품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의 정세가 급속히 안정되고, 평화의 시기가 지속되면서 골품제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 토지, 노비 등의 사회적 기반은 정체되어 있음에 반하여, 眞骨 귀족의 수적 증가로 인해 지배계층이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면서, 귀족간의 분열과 경쟁이 심화된 것이다. 통일 후 武烈王系의 전제정치 하에 일시적으로 귀족의 경제적 기반인 祿邑을 폐지하고 官僚田을 운영하였으나, 中代 末 귀족들의 토지집적과 자연재해로 인한 소농의 몰락으로 국가재정이 궁핍해지면서 귀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다시 녹읍을 부활시켰다. 귀족들 간의 경제적 경쟁은 정치적 혼란, 즉 왕위쟁탈전으로 이어지고, 또 한편으로 귀족의 수탈 강화는 농민 流亡으로 이어져 잔류민의 부담이 더욱 늘어나는 등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에 신라의 지배계층은 律令의 개정을 통해 집권체제를 정비하고, 近侍機構를 강화하고 文翰機構를 통합하는 등의 왕권강화를 시도하였으나, 기득권을 양보하지 않는 귀족들의 미온적 태도로 실패하고 말았으며, 이로 인해 신라의 구조적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모순은 필연적으로 생산계급인 농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眞聖王 3년(889)을 고비로 농민의 저항은 기존의 소극적인 소규모 저항을 벗어나, 적극적이고 대규모로 조직된 농민군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농민항쟁은 이후 불합리한 收聚制度 개선에 대한 단초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농민항쟁은 후삼국의 각축전이 전개되자 점차 소멸되는 양상을 보이며, 이로써 변혁운동의 주도권이 군사력을 가진 城主 ‧ 장군 등의 유력 지방세력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른바 豪族이라 불리는 지방세력은 신라 통치제제가 붕괴되면서,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내륙의 지주층에서 성장하거나, 軍鎭에서도 나타났으며, 바다를 이용한 국제무역 종사 계층에서도 성장했다. 이들에게 신라 골품제의 가장 큰 불만 세력이며, 唐으로 유학하여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돌아온 6두품 출신의 지식인층이 가담하여 참모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중국에서 들어온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 등도 호족의 경쟁 관계와 맞물려 크게 유행하였다. 예언과 비기로 이루어진 도참사상은 민간에 퍼진 미륵신앙과 함께 경주와 신라 지배계층의 권위를 무너뜨리며 새로운 사회를 여는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이렇게 난립하던 호족 중에서, 세력을 크게 이루어 후삼국시대를 연 세력은 甄萱과 弓裔, 그리고 궁예를 이은 王建이었다. 이들은 출신 배경과 對신라 정책에 따라 서로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통일 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과, 혼인과 정복을 통해 주변의 군소 지방세력을 포섭 ‧ 흡수해가는 통일정책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었다. 왕위계승 문제로 발생한 내분으로 몰락한 견훤과, 전제주의로 인한 반대세력과의 마찰로 멸망한 궁예와 달리, 왕건은 적극적인 親신라 정책과 호족들을 아우르는 정책을 펼쳐, 마침내 935년 후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였다.
고려의 통일은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닌, 사회 성격이 바뀌는 일대 사건이었다. 고려 사회는 이전 신라 사회와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고려는 田柴科로 대표되는 負稅制度의 개혁을 통해, 사람에 대한 직접 지배방식에서 토지를 매개로 한 간접지배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제 최소한 명목적으로는 토지가 귀족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관료에게 지급되는 급료의 형태를 취한다. 景宗 1년(976)에 始定田柴科과의 시행으로 시작하여 문종 30년(1076)에 更正田柴科로 일단락된 부세제도를 통해 중세적 토지제도가 성립되었다.
둘째, 삼국에서 통일신라까지의 고대사회에서 중앙과 지방의 관계가 정복과 복속의 개념이었던 것에 비해, 고려는 지방세력의 자치에 바탕을 둔 타협적 지배방식을 택했다. 군사 요충지 외에는 지방에 상비군을 두지 않고 官人인 파견하여, 鄕吏의 지방자치를 감독하였다. 太祖 왕건은 지방세력을 포섭하고 왕실 권위를 提高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결혼정책을 펼쳤으며, 호족의 해당 지역에서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한편 그들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事審과 其人제도를 함께 시행하였다.
셋째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없었던 신라와 달리, 고려는 외형적으로는 官職의 승진에 제한이 없는 개방적 사회였다. 宗親不仕 원칙 아래 王族의 정치 참여를 배제시키고 王室內婚을 통한 凡人과의 단절을 통해, 왕은 초월적 존재가 되었다. 동시에 정치는 관료가 맡는 정치체제를 도입하였다. 唐의 제도를 수용하여 敎育과 科擧를 통한 경쟁의 제도화를 통하여, 혈통으로 결정되는 歸屬지위를 최대한 배제하여 성취 동기를 고양하고, 또한 불완전하게나마 지역차별을 해소함으로써 신분의 유동성을 확보하였다. 지방의 호족은 점차 분화되어,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인층이 되거나 자신의 거점에서 지방의 지배층, 즉 향리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고려의 체제정비는 成宗代에 유교적 정치질서를 강화함으로써 완성된다. 성종은 光宗의 호족 억압책으로 소외되었던 세력까지 포용하고, 전시과를 통한 중세 토지제도의 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신라 6두품 출신의 崔承老를 등용하여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 체제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로써 유교는 治國의 정치이념으로, 불교는 修身의 종교로 자리매김하여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었다. 이리하여 성종 이후 체제가 정비된 고려사회를 중세사회라 부른다.
-- 도그마™: 한국중세사 중간시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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