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31일 일요일

일본의 성씨와 부부 동성제

에도 시대에는 '묘지타이토(苗字帶刀)'라 해서 무사 계급만이 성씨를 쓰고 칼을 지닐 수 있었다. 성씨는 칼과 함께 세습적 신분의 특권이었다. 일반 평민은 세습적 성씨를 갖지 못했다. 무사 계급이 전체 인구의 6퍼센트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일본의 '전통'은 부부 동성제가 아니라 '성씨'는 없고 이름만 있는 '무씨제(無氏制)' 사회였다고도 볼 수 있다.

메이지 유신 후 신정부가 1870년에 '평민묘자허용령(平民苗字許容令, 苗字는 성姓을 뜻한다)'을 공포해 처음으로 일반 서민도 성씨를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평민들은 성씨가 오히려 납세와 군역 등의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사용에 소극적이었다. 그러자 메이지 정부는 1875년에 '묘자필칭령(苗字必稱令)'을 공포하여 유럽식 호적 제도를 도입하였고 이에 따라 일본인들은 모두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

1898년 메이지 민법으로 부부 동성제가 실시되기까지 일본 사회는 기본적으로 부부 별성제였다. 메이지 민법은 에도 시대 무사 계급의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를 기반으로 삼아 호주를 정점에 세우고 가족을 호주 밑에 수직적으로 종속시키는 '이에(家)' 제도를 통해 사회를 구성하려 했다. 입적, 전적, 제적 등의 권한을 호주에게 부여하고 이에 따른 경제적·사회적 통솔권을 호주에게 일임한 것이다. 호주는 재산상의 권한을 지닌다. 또 가족 구성원의 혼인에도 호주의 동의가 필요하다. 천황을 중심으로 사회 전체를 수직적으로 통합한 일본 사회의 기본 골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부부 동성제가 탄생했다.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 pp.27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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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일 수요일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서 공攻의 두 가지 해석

子曰:"攻乎異端, 斯害也已."
자왈  공호이단  사해야이

(『논어論語』, 「위정爲政」 第二)

... '공'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논박하거나 공박한다는 의미가 하나이다(이에 따르면 '이단을 논박하면 해가 될 뿐이다'라고 해석된다). 또 공부하거나 공들인다는 의미가 다른 하나이다(이에 따르면 '이단을 공부하면 해가 될 뿐이다'라고 해석된다). '이단'이란 서로 전제나 논거를 달리한다는 의미이다.

(『朝鮮의 힘』, pp.19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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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을 전공한 아내가 예전에 동기들과 『열자집석列子集釋』이라는, 표지부터 내용까지 한글이라고는 단 한 글자도 들어있지 않은 책으로 스터디를 하는 걸 보면서 속으로 '무슨 저런 변태 같은 청춘들이 있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재밌냐고,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니까 아내의 대답이 보기보다 재밌단다. 게다가 한자漢字라는 게 수학·과학처럼 딱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즉 중의적인 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그게 또 한문을 읽는 맛이라나... 그 말을 들으니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자라는 놈이 아무리 한 글자에 여러 뜻이 들어가 있다손 치더라도 전체적인 맥락을 놓고 따져보면 알맞은 해석이 나오지 중의적일 건 또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전이니까 벌써 10년도 지난 얘기다. 그런데 오늘 오항녕 선생의 글을 보다가 그에 해당하는 사례를 이렇게 발견했다. 정말로 세상은 넓고 내가 모르는 것은 많고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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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9일 일요일

[인조실록] 조강에 논어를 강하고 사치 금단·인재 등용 등에 대해 논의하다

正言吳䎘曰: “人主學問高明, 則宮掖肅淸, 女謁自絶。 頻數開筵, 咨訪不怠, 則弊政自祛矣。”
정언 오숙이 아뢰기를, “임금의 학문이 고명하면 궁중이 깨끗해지고 여알(女謁, 궁중의 치맛바람)도 자연 근절됩니다. 자주 경연을 열어 자문하기를 게을리 아니하면 폐정은 자연 제거될 것입니다.” 하고,

元翼曰: “宣祖大王臨御之初, 樂聞陳戒之言, 故人爭進言。 今此朝臣, 雖非盡善之人, 其所言, 皆陳善之意也。”
원익은 아뢰기를, “선조 대왕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진계하는 말을 즐겨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투어 진언하였습니다. 지금의 조신들이 모두 착한 사람은 아니나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가 선을 개진하는 의도입니다.” 하니,

上不答。
상이 답하지 않았다.

持平趙廷虎曰: “人君容受直言, 實是美事, 而殿下臨筵, 罕爲酬酢。 至於大臣之言, 亦無優容之意, 勵政之初, 尙且如此, 末流甚可憂也。”
지평 조정호(趙廷虎)가 아뢰기를, “임금이 직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실로 아름다운 일인데, 전하께서 경연에 임하여 문답이 적으신가 하면, 대신의 말까지도 너그럽게 받아 들이는 의도가 없으십니다. 정치 쇄신의 초기에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훗날의 일이 몹시 염려됩니다.” 하니,

上曰: “予豈有厭聞之意乎?”
상이 이르기를, “내 어찌 듣기 싫어하는 마음이 있겠는가.” 하였다.

元翼曰: “卽祚之初, 若有宮禁溷濁之事, 則不可說也。 此弊所當痛絶之也。”
원익이 아뢰기를, “즉위하신 처음에 궁중에 혼탁한 일이 있다면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이런 폐단은 통렬히 끊어야 합니다.” 하니,

上曰: “宮禁溷濁之說, 指何事也? 明言之可矣。”
상이 이르기를, “궁중이 혼탁하다는 말은 무슨 일을 지적함인가? 분명히 꼬집어 말하라.” 하였다.

元翼曰: “頃見臺諫所啓, 則有私持、私獻入闕門等事。 此實廢朝時謬習, 豈不有駭於瞻聽乎?”
원익이 아뢰기를, “앞서 대간이 아뢴 것을 보니, 사헌(私獻, 뇌물)을 가지고 궐문으로 들어갔다는 등의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실로 폐조(광해군) 때의 그릇된 습관입니다. 이 어찌 보고 듣기에 놀랄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上曰: “予亦聞而驚駭。 此後豈復有如許事乎!”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그 말을 듣고 놀랐다. 이 뒤로 어찌 또 다시 그런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元翼曰: “聖敎至此, 甚幸。 人君有過卽改, 則如日月之更, 益有光輝, 人皆仰之。”
원익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매우 다행입니다. 임금이 허물이 있어 그것을 즉시 고칠 경우, 마치 해와 달이 일식·월식이 끝나 원상 회복이 되어 광채가 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는 것과 같습니다.”

-- 인조 1권, 1년(1623 계해 / 명 천계(天啓) 3년) 3월 26일(병진) 1번째기사 中

반정을 일으킨 후 불과 13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왕과 신하들이 모여서 경연, 즉 세미나를 했단다. 그리고 왕이 신하의 불편한 직언에 대해 일부러 반응하지 않자 그 자리에 배석한 사관(史官)은 "왕이 답하지 않았다"고 적어버린다. 이것이 이른바 조선의 힘인가... 비트포겔은 동양의 전제왕권 운운하기 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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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9일 토요일

영국의 아메리카식민지에 대한 태도와 정책의 변화

아메리카식민지에는 본국의 법률이 그대로 실시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영국은 17세기 이래 식민지에 중상주의정책을 실시하여 왔다. ... 그러나 적어도 7년전쟁이 끝난 1763년까지는 본국정부의 식민지에 대한 태도는 '건전한 방임(salutary neglect)'정책으로서, 중상주의적 통제나 종교 등에 관한 본국의 법률을 엄격하게 실시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

영국의 아메리카식민지에 대한 태도와 정책은 7년전쟁이 끝난 후 크게 변화하였다. 즉 종전의 '건전한 방임'정책을 포기하고 과세와 중상주의적 통제를 강력하게 실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이유의 하나는 1760년에 즉위한 조지 3세(1760~1820)가 先代와는 달리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에 직접 관여하려고 하였을 뿐 아니라, 그러한 태도를 식민지에게까지 적용하려 한 것이요, 둘째는 7년전쟁의 전쟁비용과, 신대륙에서 새로이 획득한 영토를 포함한 식민지 방위비 등을 식민지로부터 염출하려는 재정적 고려였다.

  • 식민지인의 알레가니산맥 서쪽지역에 대한 이주 금지 (1763)
  • 설탕법(Sugar Act, 1764): 종전의 당밀법(Molasses Act)을 개정, 타국 식민지로부터 수입하는 설탕에 대한 엄격한 과세
  • 인지법印紙法(Stamp Act, 1765): 신문, 책자, 법적 문서에서부터, 카드놀이용 카드, 학위증서까지 인지 첨부 강제 → 식민지 대표들이 인지법 회의(뉴욕)에서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헌정적 원칙 확인 → 영국 상품 불매운동 → 인지법 폐기
  • 선언법(Declaratory Act, 1766): 본국이 식민지를 통제할 법을 제정할 권리 보유함을 선언
  • 타운센트법(Townshend Act, 1767): 차茶, 종이, 도료, 유리, 납 등에 대한 과세 → 식민지의 강력한 반대로 茶에 대한 세금을 제외하고 폐지 → 보스턴 茶會(Boston Tea Party, 1773)

(서양사개론, pp.392-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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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7일 목요일

18세기 폴란드의 분할

폴란드는 슬라브 계통의 민족이었으나,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슬라브족과는 달리 그리스정교가 아니라, 로마가톨릭교회를 받아들이고, 따라서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유럽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

폴란드의 쇠퇴와 급기야는 亡國이라는 비운의 한 원인은 그 지리적 조건에 있었다. 하천이 많은 평원지대로서 폴란드는 외적을 방어할 자연의 장벽이나 장애물이 없이 개방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폴란드의 國制에 있었다. 폴란드의 군주제는 선거제였고, 선거를 좌우한 귀족들은 그들의 권한을 축소하거나 삭감할 정도로 강력한 군주를 선출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 회의의 구성원인 귀족은 저마다 절대적인 거부권(liberum veto)을 갖고 있어, 효율적인 운영을 기대할 수 없었다. ...

이러한 상황 속에서 1772년 예카테리나女帝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대왕과 협의하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를 끌어들여 저마다 인접한 폴란드의 일부 영토를 나누어갖기로 했을 때 폴란드는 저항할 힘이 없었다. 영토의 4분의 1을 상실한 폴란드의 귀족들은 대책을 강구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제1차 폴란드 분할]. 1793년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제2차 분할에 서 원하던 영토를 다시 획득하고, 1795년에는 코슈추슈코(Thaddeus Kosciuzko)를 중심으로 한 폴란드 애국자들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영토가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에 의하여 분할되어 폴란드는 멸망하였다. 그 후 ... 그들이 독립을 회복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였다.

(서양사개론, pp.357-358)

2010년 5월 23일 일요일

대발견 시대와 선박의 크기, 그리고 해상 사업

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15세기 이후에 조선 기술이 눈에 띄게 진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배의 크기가 당장 커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소위 '대발견(The Great Discovery)' 시대 선박들의 특징은 오히려 크기가 작다는 데에 있었다. 원래 해외 탐험은 위험이 큰 사업이어서 처음부터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사용되는 선박 역시 소규모였다. 그러나 자본 부족으로 작은 배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점 외에 오히려 작은 배가 유리했다는 점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낯선 해안에 상륙해야 하는 배들은 너무 크면 해안에 좌초할 우려가 있어서 오히려 불리했다. ... '대발견'은 소도시의 소수 사람들의 사업이며, 공장이라기보다는 장인들의 공방 수준에서 이루어진 기술 발전에 힘입어 이루어진 것이다. ...

그러나 '발견'과 '탐험'의 시대가 지나가고 '정복'과 '교역'의 시대로 접어들자 상황이 바뀌었다. 낯선 바다와 낯선 대륙을 탐험하는 데에는 오히려 작은 배가 유리할지 몰라도 어느 정도 안정 단계에 이르면 큰 배를 이용한 상업이 유리하게 된다. ...

근대 초에 유럽의 배들이 규모가 커지고 디자인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 배들은 실로 가소로운 수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배들은 오늘날 한강 유람선(약 280톤 급)만 한 배들이었다. 근대 초 유럽의 원양 항해는 비유하자면 한강 유람선을 타고 인천을 떠나 인도양과 희망봉을 거쳐 유럽까지 항해하고 돌아오는 행위에 해당한다. 유럽의 해양 탐사를 설명하면서 '진취적인 용기' 운운하는 것은 순전히 레토릭만은 아닌 것이다. ...

근대 초의 해양 항해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이루어진 위험에 찬 사업이었다. ... 그러나 처음에 소자본을 가지고 시작한 '벤처 기업'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확장되었다. 초기의 위험 요소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수익 가능성이 확인되자 지금까지 사업의 전망을 주시하던 대자본과 정부도 간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변방 국가만이 아니라 중심 국가들도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선박도 커지고 항해의 전체 규모도 폭발적으로 커졌다. 여전히 위험성은 컸지만 그것을 내부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체제가 형성되어 갔다.

(대항해시대, pp.136-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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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0일 목요일

한국전쟁과 中蘇분쟁

트루만 대통령과는 달리 애틀리 수상은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공산주의자인 점은 틀림없지만 스탈린주의자는 아니라고 믿었다. 애틀리와 베빈 등 노동당 지도자들은 또한 중국 공산주의에서 강한 민족주의와 외국의 영향에 대한 강한 반발의 전통을 감지하였다. 따라서 중국정부를 모스크바에 의해 조종되는 허수아비 정권으로 차치해 버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서방의 정책은 이 두 공산세력의 분열을 추구하여야 하며, 中蘇간의 분쟁의 여지는 이미 한국전쟁을 시작함으로써 소련은, 대만을 무력으로라도 통일하고자 하는 중국의 열망을 좌절시켰다는 것이다.

(박지향, 「영국노동당과 한국전쟁」, 『역사학보』, 1994,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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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4일 금요일

'Global History'에 대한 여러 번역 용어들

  • 차하순, 강선주, 정선영: '세계사', '새로운 세계사'
  • 김원수: '지구 규모의 역사', '글로벌 역사', '글로벌히스토리'
  • 조지형: '지구사'
  • 배한극: '글로벌히스토리'
  • 이영효: '글로벌 역사', '전지구적 역사'
▶ 배한극의 견해: '세계사'는 종전의 세계사와 구별되지 않고, '지구사'는 지구과학에서 논하는 지구사와 혼동되기 쉽다.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 pp.355-356)

2010년 5월 13일 목요일

프랑스 혁명과 유대인 해방

보통 프랑스 혁명기의 유대인 해방은 프랑스 혁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이 프랑스 혁명에게 억압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이라는 보편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좀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1791년 9월 27일에 프랑스 국민의회는 프랑스 내의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주기로 의결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법적 평등을 보장해 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혁명가들은 당연히 이를 혁명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쾌거로 환영했다. 많은 유대인들도 이것이 수 세기에 걸친 굴욕과 법적 차별, 주류 사회로부터의 배제를 끝내 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

그래서 겉으로만 보면 이것은 인간 해방이라는 점에서 시대사적인 의미를 갖는 전환점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해방이 아니라 큰 희생을 요구하는 거래였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시민권을 부여받기 위해 유대인 공동체의 자율성을 허용하는, 과거에 프랑스 왕으로부터 받은 특권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 민사적인 일에 대해 유대교 성직자인 랍비가 가진 관할권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프랑스인이 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자격으로서였다.

혁명가들이 유대인들에게 이런 요구를 한 것은 그들의 종교적 공동체를 제거함으로써 프랑스 문화에 쉽게 동화시키기 위해서였다. ... 그리하여 일부 유대인들이 개인적으로 프랑스 사회에 편입되는 대신 유대인의 종교 공동체는 공식적으로 부인되었다. ...

결국 혁명기의 공화국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명분으로 유대인에게 형식적인 법적 평등을 주는 대신 그들의 공동체를 부인함으로써 그 종교생활의 파괴를 기도한 것이다. 동화를 하지 않는 한 그들이 진정한 프랑스 국민이 될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3공화정 하에서 창궐한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는 혁명기 프랑스인의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오늘날 이슬람 이민자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태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 공공생활에서 이슬람교적 행위를 금지하려는 것이다.

(「한국에서 서양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 pp.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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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9일 금요일

고려高麗의 사원寺院과 촌락村落

... 신라말 경주는 민가와 사원이 뒤섞여 있다고 지적되고 비판받았다. 그러한 일을 막기 위해 고려에서는 '사가위사捨家爲寺'를 철저히 금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민가와 사원이 뒤섞여 있는 일은 흔치 않았다. ... 깊은 산속 골짜기에 자리한 사원도 많았는데 이 경우에는 수행이 중요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중요 교통로에 자리하는 수도 많았다. ... 여행자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우마에게 꼴을 주기도 하였다. ... 고려 시기에 사하촌寺下村은 발달하지 않은 듯하다.

사원을 짓는 데는 엄청난 재력과 인력이 필요했다. 그러한 재력‧인력을 사원이 마련하는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세속 사회에서 제공받았다.

사원은 토지 경영이나 고리대‧상업 등 각종 경제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경제 활동을 통해 사원과 세속 사회는 깊은 유대 관계를 맺었다. 사원 토지는 보통 흩어져 있었다. 세속인의 토지와 섞여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사원 토지를 경작하는 민인은 특정 촌락에 사는 민인이 망라된 것은 아니었다. 민인은 자기 토지를 소유하고 사원 토지를 경작하기도 하고, 남의 토지를 소작하고 사원 토지를 경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원 토지가 장생표를 세우는 방식으로 특정 권역을 이루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이때는 권역 내에 사는 민인 모두가 사원의 지배를 받은 듯하다.

사원은 세속 사회와 관계를 맺고서 유지 운영되었다. ... 그렇지만 사원이 특정 촌락과 배타적‧독점적 결합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서구의 교구식으로 사원을 운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깊은 이야기 3, pp.198-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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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 노비奴婢와 양수척楊水尺

사노비私奴婢는 특정 개인이 소유한 노비다. 사노비는 주인의 사유 재산으로 물건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 노비는 이름만 있었을 뿐 성姓이 없었으며, 국가에 대한 공역公役 의무도 지지 않았다.

사노비는 일반 양인이 경제적인 이유로 몸을 팔아 생겨나는 경우가 많았다. 불법으로 강제로 종을 삼아 사노비가 생기는 수도 많았다. 일단 노비가 되면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신분 세습과 관련해 통상 적용되는 원칙은 '일천즉천一賤則賤'이었다. ... 노비에 대한 소유권은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어머니 소유주에 귀속하였는데, 어머니가 양인이면 아버지의 소유주에 귀속되었을 것이다.

주인이 노비에게 가하는 매질 따위의 가해 행위는 불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죄의 유무를 불문하고 주인이 죽이는 것은 불법이었다. ...

반면 사노비는 주인에 대해 절대 복종해야 했다. ... 주인의 범죄도 고발할 수 없었다. 예외적으로 반역 같은 중대한 범죄는 고발해야 했다. ...

공노비公奴婢는 국가 기관에 속한 노비다. 공노비는 전쟁 포로에서 비롯되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반역‧적진 투항‧이적 같은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 관에서 당사자나 가족을 잡아들여 생겨났다. 귀족층 가운데 이런 이유로 공노비가 되는 수도 있었다.

공노비는 값이 정해지지도 않았고 매매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 공노비는 누구나 독자적인 가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 재산을 소유하여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도 인정하였다. 이 점에서 공노비는 사노비에 비해 신분상 지위가 높았다고 할 수 있다. ...

사원노비寺院奴婢는 다양하게 생겨났다. 국가가 공노비를 지급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개인이 소유한 사노비를 시납施納하는 수도 있었다. 때로는 사원이 국가의 양민을 노비로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사원노비는 공노비도 아니고 사노비도 아닌 것으로 분류되었다. 사원노비가 사원에 대해 지는 부담은 공노비나 사노비보다 가벼웠다. ...

고려 시기에는 유기를 만들어 팔고, 도살업屠殺業에 종사하며, 광대(창우娼優) 일을 하는 특수한 층으로 양수척楊水尺이 있었다. 양수척이 후백제의 후손이라고 설명하는 자료도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양수척은 여진족이나 거란족의 후손인 듯하며 고려 초부터 있었다.

양수척은 정처 없이 이동하였으며 관적貫籍도 없었다. 따라서 부역이 부과되지 않았다. 이는 고려 국가가 이들을 국민 외의 존재로 봤음을 뜻한다. 그러나 남에게 소유되어 팔리지 않았으며, 이 점에 노비와 뚜렷이 구별되었다.

사회적으로 천대받았던 이들은 적이 쳐들어왔을 때 향도 구실을 하기도 했고,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왜구로 가장해 피해를 입힌 경우도 있었다. 양수척은 뒷날 백정白丁(도살업자)의 효시가 되었다.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3, pp.184-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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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7일 수요일

근대의 폭력성과 유럽

'근대화된' 유럽의 폭력은 분명 성격이 달랐다. 그들이 멀리 해외로 나아갔을 때에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무의미한 폭력을 행사항 이유도 없을 뿐 아니라, 또 실제로 그들이 해당 지역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에서 역설적으로 유럽 세력은 자신들의 무력을 최대한 유효하게 집중하여 사용해야 했다. 그들의 원하는 이익을 얻기 위해 필요한 지점에 그들이 가진 무력을 최대한으로 쏟아 붓는 이런 '합리적인 폭력'이 실제로는 더 가공할 결과를 가져왔다.

총포와 화약이 유럽의 승리의 기반이 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럽의 승리를 너무 단순하게 총포의 승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오토만 제국, 중동 지역, 인도, 중국, 한국과 일본 모두 조만간 총포를 수용했으며 유럽만이 총포를 독점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총포의 유무가 아니라 그것을 어느 편이 더 유효적절하게 사용했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 많은 학자들은 근대 유럽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데에는 폭력 면에서 앞섰기 때문이며, 또 결국 유럽이 전 세계에 팔아먹은 것은 폭력이었다고 주장한다.

(대항해시대, pp.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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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십자군

위대한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 1198-1216)가 발진시킨 제4차 십자군은 십자군이란 이름조차 무색케 하는 결과로 끝났다. 1204년 이노센트는 군대를 모아 베네치아의 함대에 태우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인들은 성지의 회복보다는 그들 자신의 상업적 이익에 훨씬 더 관심이 컸다. ... 그들은 이윤이 많이 남는 콘스탄티노플과의 교역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완전히 독점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1204년의 십자군은 그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베네치아인들은 십자군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교황의 원래 계획에 따라 성지로 향하는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게 하였다. ... 십자군의 공격으로 옛 비잔틴 제국은 완전히 분해되어 버렸다. 그에 대신하여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제국(Latin Empire of Constantinople)이 들어섰고, 플랑더즈伯 볼드윈(Baldwin)이 황제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단지 수도와 아드리아노플, 그리고 그 두 도시 사이의 지역과 소아시아의 가까운 해안지대에 대해서만 직접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십자군 제후들은 각기 테살로니카(Thessalonica) 왕국, 아테네 공국, 아케아(Achaea) 공국 그리고 그 밖의 여러 나라를 세워 그 지배자가 되었다. 이들 나라는 원칙상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봉토였으나, 실질상으로는 독립된 나라였다. ...

콘스탄티노플에 최후의 공격을 감행할 때까지 이노센트 3세는 십자군이 성지에 가지 않고 딴 짓을 하는 것에 대해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이 막상 벌어지자 그는 라틴 제국의 설립을 하나님의 놀라우신 役事로 환영하였다. 그는 뒤늦게 정복 뒤의 야만스러운 약탈 행위를 전해 듣고 깜짝 놀랐으나, 곧 이미 이루어진 사실과 타협하였다. 어쨌든 라틴 기독교 세계가 또 하나의 영역을 차지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서양중세사, pp.265-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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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사학의 특징

(한국) 전통사학의 특징을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교훈으로서의 역사다. 역사란 군신의 업적을 기록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후세에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다. 역사는 '정치의 거울'로서 과거 사실의 시시비비를 가려 역사 속에서 규범을 찾는 도덕주의가 본질이었다. ... 따라서 역사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을 원칙으로 했고 사실의 정확한 기록은 사관의 임무였다. 또한 군주, 명신, 장졸, 학자 등은 물론 반역, 혹리, 간신 등의 실상을 기록함으로써 포폄에 도움이 되게 했고, 기전체에서 열전의 비중을 크게 하여 인물의 공과功過를 강조했다.

둘째, 경학으로서의 역사다. 한국 전통사학은 과거 경험을 중시하는 복고적이며 상고적인 가치체계에 기반한다. ... 즉 경학으로서의 역사는 독립된 학문이 아니라 유교의 일부로서 군주의 정치철학을 제공하는 정치의 바탕이 되었다. 역사 내용은 유교 경전의 정신이나 내용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어 경전이 곧 역사였다. 이와 같은 경사일치의 전통사학은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정치철학으로서 통치자의 정치수단이기 때문에 국가와 왕실 중심의 서술 형태를 취했다.

셋째, 자아의식으로서의 역사다. 전통사학은 중국 중심의 역사인식 체계를 갖고 있다 해도 주체적인 자아의식과 국가의식을 담고 있었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화이론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다. ... 기본적인 체제, 서술 방법, 인물 평가 등에서는 중국의 원칙을 따랐으나, 독자적인 연호와 월력을 사용했으며 이른바 삼한정통론을 주장하여 주체적 역사인식을 발전시켰다. ...

(역사교육의 이론, pp.10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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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2일 금요일

영국 동인도회사와 면직물

여러 이유에서 중요성을 더해 간 것은 면직물이었다. 면직물은 아시아 내의 가장 중요한 공산품이었는데, 이것이 뒤늦게 유럽에 소개된 것이다. 순면 제품은 이전에 레반트 교역이나 포르투갈의 사업에서도 거의 없던 것이며, EIC(영국 동인도회사, East India Company)가 1623년에 처음 시도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 그런데 1660년대에 들어서자 면직물 판매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상승을 기록했다. ... 인도의 면직물은 기술과 사업 조직의 변화 없이도 더 많은 인력 투입으로 공급 증가가 가능했고, 다른 한편 유럽에서는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당장은 이 직물을 자체 생산하지 못했다. 그러니 인도 직물 수입이 그토록 급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목면은 유럽인들의 "외피(外皮)를 홀랑 바꾸어 버린" 중요한 품목이었다. 그 이전에 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모직물이 중요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마와 대마, 혹은 이런 것들을 혼합해서 짠 직물들을 사용했다. ... 처음 목면이 유럽에 들어오자 '충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대 열풍을 일으켰다. 인도에서 짠 캘리코는 값이 싼데다가 품질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 처음에는 면직 옷을 입고 다니면 식탁보를 입고 다닌다는 놀림을 당했으나, 곧 사람들은 이 멋진 아시아 직물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소위 '캘리코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많은 양의 캘리코가 수입되자 모직물, 견직물, 특히 리넨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일자리를 빼앗길 위험에 빠진 직공들의 저항이 거세게 터져 나왔다. ... 각국에서 자국 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조치들이 강구되었다. ... 그렇지만 대세를 법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역사의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이런 위기가 결국에는 산업혁명을 초래해서 영국의 면직물이 인도에까지 수출되고 급기야는 인도 면직물업이 심대한 타격을 입고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대항해시대, pp.1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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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30일 화요일

서임권 투쟁의 결과

20여 년에 걸친 투쟁 끝에, 교황과 황제의 양 진영에서 온건한 사람들이 진지하게 타협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기본적인 관심은 세속적인 지배자가 성직을 부여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 왕들의 기본적인 관심은 세속적인 지배권을 겸비하게 될 주교들로 하여금 그들의 세속권이 왕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케 하는 데 있었다. ... 1107년에 캔터베리의 성 안젤름과 헨리 1세(Herry I)는 영국에서의 타협안을 마련하였고, 이는 뒤이어 교황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에 따르면 주교는 우선 교회법에 따라 선출된 다음, 봉신으로서 왕에게 臣誓를 하고 왕으로부터 봉토와 직책에 따른 세속 사법권을 받고 나서야 주교로 축성되도록 되어 있었다. ...

서임권 투쟁을 종결시킨 이른바 보름스 화의(the Concordat of Worms)라 불리는 타협은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 2세(Calixtus II; 1119-1124) 사이에서 1122년에 이루어졌다. 그 타협안은 독일의 경우 왕이 주교를 선출하는 자리에 참석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영국에서의 타협안과 비슷했다.

왕들은 ... 실제로는 여전히 주교를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나치게 부적격한 인물을 성직에 임명하기는 훨씬 더 어려워졌다. ... 분명히 12세기에는 성직 임명의 기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서임권 투쟁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왕의 神政政治가 서구 세계의 통상적인 정치형태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저지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써 교황의 神政政治가 대두한 것은 아니었다. 교황이 왕을 폐위할 수 있다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주장은 왕들에게 전혀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기껏해야 매우 논쟁의 여지가 많은 주장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 투쟁의 결과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권력을 남용한 통치자에 대한 저항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론이 태동하였다는 것이었다. ...

독일 전역에서 제후들은 (왕권에 맞서) 그들의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 봉건제가 독일 전역에 확산되었다. ...

교황은 투쟁을 통해 권위를 크게 높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정치적 요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종교적 문제에 관한 한 기독교 세계의 최고 지배자로서의 교황의 지위는 강력하게 재천명되어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

(서양중세사, pp.23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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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대학의 출현

오늘날의 대학—정규 연구과정을 제공하고 학위를 수여하는, 교수와 학생의 공동체—은 12세기 말‧13세기 초에 기원하였다. 대학을 뜻하는 universitas는 기본적으로 "모두"라는 집합적 의미를 지녔으며 ... 대학은 본질적으로 교육 길드였다. 북유럽에서는 대학이 선생들의 길드였고, 반면에 이탈리아와 남유럽에서는 학생들의 길드였다.

... 12세기 말에 볼로냐 대학에는 적어도 4개의 과정—수사학, 로마법, 교회법, 그리고 의학—이 개설되어 있었다.

볼로냐 대학의 명성에 이끌려 서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볼로냐로 몰려들었다. ... 이들 학생 길드(nation이라고 불리었다)는 각각 학생장(rector)을 선출하여 길드를 대표케 하였다. 곧 여러 다른 분야를 가르치는 교수들도 독자적인 길드를 형성하였으나, 학위수여 요건에 관한 것을 제외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학생 길드가 주도권을 쥐었다. ...

빠리 대학은 노트르 담(Notre Dame) 성당학교의 명성에 이끌려 빠리로 모여든 교수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 12세기 말에, 빠리에서 가르치고 있던 교수들은 조합, 즉 대학(university)을 형성하였다. 1200년에 존엄왕 필립 2세가 빠리의 교수 및 학생들에게 특권을 부여한 특허장에는 이 교수조합이 언급되어 있었고, ... 총장은 원칙상 교양학부의 우두머리에 불과하였으나, 교양학부가 가장 컸으므로 대학의 최고 관리임을 주장하였고, 신학부의 학장과 오래도록 격렬한 투쟁을 거쳐 결국 그렇게 인정되었다.

영국에서 옥스포드시는 지리적으로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고, 12세기 초반에는 이따금 빠리와 심지어 볼로냐로부터도 교수들이 흘러들어와 그곳에서 강의하곤 하였다. ... 캠브리지 대학의 기원은 지극히 모호하지만, 옥스포드와 빠리에서 옮겨온 교수와 학생들에 의해 창설된 것임은 분명하다. ...

... 각 대학은 聖‧俗의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오랜 투쟁을 감행하였다. 모든 교수와 학생이 사제처럼 삭발하고 교단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원칙상 세속 정부에 의한 체포와 처벌에서 면제되었다. 그러나, 대학의 우두머리들은 사실상 광범위한 세속적 권한을 획득하였다. ...

... 일단 입학한 학생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의 세 과목을 배우기 시작했다. 빠리에서는 문법책 2권과 논리학책 5권을 강독받으면, 문학사(bechelor of arts)가 되었다. 문학사는 일종의 도제 교사가 되어 문학사가 되려는 학생을 가르칠 수 있었다. 5~6년 동안 그러한 일을 하면 문학碩士가 되었다. ...

문학석사가 된 학생은 대학을 떠나든지, 교양과목을 가르치든지, 아니면 법학, 의학, 또는 신학의 학위를 받기 위해 기나긴 수업과정에 들어가든지 선택할 수 있었다. ... 가장 존중받던 교과정은 神學이었고, 그 박사학위를 따는 것은 진짜 어려운 일이었다. ...

13세기 후반에는, ... 이들 자선가들은 가난한 학생을 무료로 또는 아주 싼 값으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기숙사를 설립하였다. ... 그리하여 세 대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칼리지(college)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빠리에서 최초로 나타난 칼리지 가운데 하나는 부유한 상인 로베르 드 소르봉(Robert de Sorbon)이 1258년에 설립한 것으로, 이 소르본느(Sorbonne)는 지금도 유명하다. ... 중세 말에는, 대학 강의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그 대신 칼리지가 교육업무의 대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

명백한 온갖 결점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중세 문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 대학 졸업생들은 전문직에 종사하였다. 대학을 떠난 문학석사들은 학교 선생이 되거나 관리가 되었다. ...

(서양중세사, pp.4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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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7일 토요일

조선시대 수전농업(직파법과 이앙법)

연작상경의 작부체계와 함께 『농사직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벼농사에 대한 강조이다. 그 경작법은 세 가지였다. 묘판에 씨앗을 뿌리고 유묘를 잘 키운 다음 나중에 본답에 옮겨 심는 현재 흔히 볼 수 있는 이앙법(移秧法)은 그 중에 세 번째로 서술되어 있다. 첫 번째는 물이 흥건한 논에 처음부터 씨앗을 뿌리고 키우는 수경직파법이고, 두 번째는 밭작물을 키우는 것처럼 물이 없는 논에 씨앗을 뿌리고 키우는 건경직파법이었다. 이 중에 기술적으로 가장 발전된 재배법은 수경직파법으로 오래전부터 해 오던 방식이며, 15세기 당시에도 가장 일반적인 벼 재배법이었다. 건경직파법은 물 부족으로 수경직파법을 할 수 없을 때 오랫동안 터득해 온 밭작물 재배법의 노하우를 이용해 벼를 재배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이앙법은 1년 중 항상 물이 차여 있을 정도로 물이 풍부한 매우 제한적인 논에서만 가능한 예외적인 방식으로 기술수준도 낮았다.

혹자는 『농사직설』의 편찬의 가장 큰 목적이 벼농사 기술의 안정적 확립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 수경직파법을 하다가 제때에 비가 오지 않아 건경직파법을 하면 거기에 드는 제초작업의 노동력은 비교할 수 없이 많이 필요했다. ... 그러나 이앙법은 인수와 배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여건 아래에서만 가능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농사직설』에서는 농민들에게 되도록이면 하지 말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따라서 15세기 당시에 이앙법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 시대가 흐를수록 매우 고도의 경작법이 개발되었다. ... 나아가 메마른 논에서 이앙을 할 수 있는 경작법까지 개발되었다. 18세기의 대표적 농서 『산림경제』에 제시되어 있는 '건앙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건경직파식 벼 재배법이나, 건앙법과 같은 독특한 이앙법은 그야말로 수리시설이 열악한 여건에서 조선의 농민들이 개발해 낸 고도의 벼 재배법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벼농사는 전기의 직파법에서 후기의 이앙법으로의 전환이 가장 큰 역사적 흐름으로 이해된다. 이앙법은 그 자체로 벼의 높은 수확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한 해에 벼와 보리를 번갈아 심음으로써 1년 2모작을 가능하게 하는 수준 높은 기술이었다. 이앙법은 그만큼 생산력의 획기적인 증가를 상징하는 것이다. ...

(한국사특강, pp.292-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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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6일 금요일

문종대 고려 중앙집권체제의 완성

현종(顯宗)이 재위 22년 만에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세 아들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다. 덕종(德宗)‧정종(靖宗)을 거쳐 11대 문종(文宗, 1047~1083) 때에 이르러 지배체제를 비롯한 문물제도의 보완과 재정비를 통해 고려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 원년(1047)에 율관(律官)들로 하여금 법률을 정리하게 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3년(1049)에는 양반공음전시법(兩班功蔭田柴法)을 새로 제정하, 5년(1051)에는 향리의 9단계 승진규정을 마련했으며, 6년(1052)에는 사직단(社稷壇)을 신축하고, 왕실 봉작(封爵)제도와 태자첨사부(太子詹事府)의 직제를 정비하는 등의 조치가 그러한 예였다. ... 마침내 재위 30년(1076)에 이르러 그때까지 정비를 거듭해 온 관료체제를 더욱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백관들에 대한 반열(班列)의 차서까지 정했고, 또한 관리들에게 복무의 대가로 지급하던 양반전시과(兩班田柴科)를 다시 고치고, 아울러 현물로 주는 녹봉제를 재정비함으로써 고려의 제도적인 정비가 일단 완결을 보게 되었다.

(한국사특강, pp.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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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방행정(관찰사와 8도제)

고려시대의 지방 통치는 향리들에게 거의 다 맡겨지다시피 했다. 중앙정부는 시찰관으로서 안찰사(按察使)를 5도에 파견하여 반년 임기로 순행하는 제도로서 향리들의 통치를 감독했다. 후기로 내려오면서 도의 행정적 기능이 강화되고 지방사회의 분화 발전에 따라 지방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가 필요해졌다. 안찰사는 1389년(공양왕 원년)에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바뀌었다가 질품을 재상급으로 올려 전임(專任)의 관찰사제가 정착했다. 조선시대의 도의 관찰사제도가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로써 중앙집권화가 일보 전진하여 지방행정체제의 관료화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는 각 지방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이제 지방 호족의 군백성이 아니라 왕의 백성으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인력으로 동원될 수 있는 체제가 잡혔다. 1409년(태종 9)에 8도의 윤곽이 잡히고, 1413년(태종 13)에 지방제도의 개혁이 대대적으로 단행되어, 대소 군현의 병합을 비롯해 여러 조정 장치가 이루어져 8도제가 이루어졌다.

(한국사특강,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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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4일 수요일

조선의 관품체계와 인사제도

한편 조선의 관료는 누구나 관품체계 속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조선초기의 관품제는 관품이 관직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자체가 하나의 기준으로도 기능을 하였다. 이것은 관직을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관품을 통하여 지배층의 일원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따라 중앙과 거의 동질적인 지배층이 전국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관직의 수보다 훨씬 많은 규모의 지배집단을 효과적으로 편제할 수 있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관품은 18품 30계로 이루어졌는데, 관품에서의 기본적인 구분선은 4품과 5품 사이로서 대부大夫(將軍)와 사士(郞, 尉)로 그 칭호를 달리하였다. 그리고 관직과 연관하여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당상관, 그 아래를 당하관이라 하였으며, 종6품으로 기준으로 그 이상을 참상관, 그 아래를 참하관이라 하였다. 여기서 정3품이상의 당상관은 기본적으로 정치가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아 근무일수에 관계없이 왕의 명령에 의하여 승진이 되었다. 참상관과 참하관은 거관去官하여 승진하는 데 필요한 근무일수에 차별이 있다. 인사발령에서도 대부 이상은 왕의 교지敎旨에 의하였으며 대간臺諫의 서경署經이 면제된 데 비하여, 사士인 낭계郎階의 경우는 교첩敎牒의 형식으로 발령되었고 대간의 서경을 거쳐야 했다. 이는 고려시대에 모든 관원의 인사에 대간의 서경이 필요하였던 것과 비교하면 왕의 인사에 관한 권한이 강화되면서 귀족적인 성향이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中, 한국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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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集賢殿과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

유교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문물제도를 유교적인 것으로 재정비해야 했고 유교정치를 담당할 많은 유신을 필요로 했다. 대명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하여도 학자적 관료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은 조선이 대명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유교국가로 발전하기 위하여 불가결한 요건이었다. 조선 개국 초에는 많은 인재들이 개국에 동참하였으므로 인재난은 없었다. 그러나 태종 10년(1410)이 되면 개국 초의 인재가 대부분 사라지게 되어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은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세종 2년(1420) 3월 집현전集賢殿은 그러한 국가적 요구에 부응하여 설치된 것이었으며, 그것은 세종대의 문화와 정치의 수준을 높여준 원동력이 되었다.

세종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뽑아 집현전을 채웠으며 그들로 하여금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학술적인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집현전관集賢殿官은 경연經筵, 서연書筵, 지제교知製敎, 사관史官, 시관試官, 고제연구古制硏究, 편찬사업 등 학술적인 직무를 수행하였고,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두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쟁쟁한 학자들이 양성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유교적 의례 제도의 정리작업과 편찬사업이 전개되었다. 유교정치를 할 수 있는 기틀이 여기서 만들어졌고 세종대의 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조선왕조의 성립과 대외 관계 中, 한국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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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대 신사층의 형성

명대 중엽 이후부터 청 말까지 국가의 지배를 보조하는 중간적인 지배계층으로 신사층紳士層이 있었다. 이들은 휴직 또는 퇴직한 관료로서, 관직의 경력이 있든지 아직 관리가 되지는 못했으나 과거제, 학교제 등을 통해 일정한 학위를 소지한 생원生員, 거인擧人(3년에 한 차례 치르는 향시 합격자), 공생貢生, 감생監生(최고학부인 국자감의 학생) 등으로 관위를 지망하는 사람들이었다.

... 그러나 명 중기 이후 이갑제 질서가 해체되어 가면서 관직에 나가지 못한 학위소지자들이 관직경력자들과 더불어 향촌의 질서유지에 지도적 역할을 하면서 이들은 국가나 평민으로부터 크게 보아 신사층이라는 하나의 계층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

... 신사는 향촌의 질서를 유지하고 경제적인 활동을 통해 공익과 사익을 추구했으며 향촌을 교화하고 여론을 지배했다. ... 이는 또한 신사의 영향력을 통해 이갑제 질서의 공백부분을 보충하려던 국가와 향촌사회의 요청에 부응해 신사가 공적인 역할을 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사는 ... 특권을 이용하거나 때로는 남용해 ... 사익을 우선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신사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들이 사리사욕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들의 특권이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농민의 부담으로 전가되었고 한편으로 향촌사회의 분해를 조장하는 부정적 기능도 했다. ...

명 말과 청 초의 동란기에 자위를 위해 무장했던 신사는 강력해 보이는 청조권력이 자신들의 사회적 특권을 그대로 보장해 주리라는 전망이 보이자 청조에 투항해 향촌사회에서 국가권력을 보좌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 국가권력으로서는 때로 신사를 탄압할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이들을 체제 내로 포섭하지 않고서는 원만한 통치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신사층은 왕조의 존망을 초월해 사회의 지배적인 계층으로서 청대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했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p.263-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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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3일 화요일

안사(安史)의 난과 성당(盛唐)의 종언

7세기 후반이 되면 (당의) 율령律令통치가 동요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 단적인 표현이 바로 도호逃戶였다. 도호란 일반 민호가 국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이 타지역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무후대부터 현종대에 걸쳐 나타난 이러한 현상은 자연재해나 관리들의 폭정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토지의 겸병에 의한 소농민의 몰락과 유랑 혹은 과도한 부賦‧병역兵役의 편중 부담이 그 원인이었다.

이에 대해 국가에서 기존의 정책을 답습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었다. 따라서 객호客戶를 본적지로 송환시켜 호적에 재등재시키는 기존의 방식에서 객호의 존재를 인정하고 거주지의 호적에 등재토록 하는 등 정책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병농일치를 기반으로 한 부병제府兵制의 운용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결국 천보원년(742)에 변경에 10개의 번진藩鎭이란 군사 통치기구를 두었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절도사節度使를 두면서 점차 직업적인 모병제도가 일부 도입되었다. 이는 병제 전반이 부병제에서 모병제로 이행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모병제로의 전환은 당조에 재정의 부담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안겨 주었다. 부병제는 자비부담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당조가 군대를 유지하는 데에 별대른 재정부담이 없었지만, 모병제로 바뀌면서 병사의 의료와 식량 및 생활비까지 지급해야 하는 등 부담이 늘어났다. 여기에 이들을 거느리고 있던 절도사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 이 상황은 안록산安祿山이 등장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9년 동안 화북지역을 전란으로 몰아넣은 (안사의) 반란의 영향은 매우 지대했다. 우선 호구 수가 반란 전 890만 호에서 반란 직후에 290만 호로 격감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반란 전부터 궁핍하던 재정이 한층 더해졌다. 또 반란에 가담했던 절도사들이 거의 그대로 지역을 장악한 채 분권적인 행동을 취했다. 게다가 부병제는 완전히 무너져 모병제로 전환되었고, 균전제均田制와 조용조제租庸調制도 완전히 붕괴되었으므로 율령제 지배는 여기서 완전히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p.176-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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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2일 월요일

로마사회의 변화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포에니 전쟁 이후 신흥부유층의 출현, 그리고 라티푼디움의 유행과 더불어, 로마사회의 매우 중요한 변화는 자유농민층의 몰락이었다. ... 자유농민의 몰락은 시민군의 약화라는 군사면의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건전한 중산층의 몰락으로 로마사회는 빈부의 양극화현상을 보이고 그것은 매우 심각한 사회불안을 조성하게 되었다. ...

그라쿠스(Gracchus) 형제의 개혁은 바로 이러한 사태를 시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된 목표는 자유농민을 부활시킴으로써 사회불안을 일소하고, 로마의 군사력을 옛처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스키피오의 외손자요 평민출신 집정관의 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Tiberius) 그라쿠스는 기원전 133년에 호민관으로 선출되자, 리키니우스법의 제한을 넘어서 불법으로 점유한 토지를 몰수하여, 무산시민(proletarii)에게 분배하려는 개혁안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에 의하여 그의 지지자들과 더불어 살해되고 말았다. 기원전 123년에 호민관으로 선출된 동생 가이우스(Gaius)는 더 광범한 사회층의 지지를 획득하고 원로원을 고립시킴으로써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가난한 시민에게 시장가격보다 싸게 곡물을 판매하고, 카르타고의 옛 영토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무산시민을 이주시키는 방안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는 한편, ... 반대파의의 공격에 몰린 가이우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사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통하여 로마으 지배층은 원로원을 중심으로 기득권과 현상을 유지하려는 옵티마테스(Optimates: 閥族派)와 그들에 대항하여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포풀라레스(Populares: 民衆派)로 갈라지고 이후 약 100년간 두 파 사이에는 내란이라고 할 정도로 치열한 정권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

(서양사개론, pp.10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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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중세 도시

그러나 로마 제국 후기 이후 도시 문화는 전반적으로 위축되었으며 곳에 따라서는 단절되었다. ... 중세 도시의 본격적인 성립과 발달은 상업의 부활 이후 상업의 발달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중세 도시들은 대부분 ... 원격지 상업의 중심지와 국지적 상업의 교통 요지에 위치해 있었다. ...

그러나 봉건사회의 생산력의 한계로 말미암아 중세 도시는 일정한 크기 이상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 주민 수가 10만 명이 넘는 도시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거주 인구가 1만 명 이상이 되면 대도시로 취급되었다. ... 인구가 2,000~1만 명인 도시는 중도시에 속했고, 500~2000 명인 도시는 소도시로 분류되었다. ... 중세 도시들 가운데 90~95%가 소도시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중세 사회에서 도시는 광대한 농촌 사회 속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작은 섬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봉건적인 농촌 사회로 둘러싸여 있는 중세 도시는 봉건적 생산관계에 기생하는 한편, 교환경제와 수공업의 거점으로서 봉건적 생산관계를 해소시키는 작용을 했다. ... (중세 도시의 독특성은) 우선 중세 도시는 공간적으로 성곽도시였다. ... 성탑과 성문이 있는 성곽은 도시가 단순한 요새가 아니라, 성곽 밖의 봉건적 농촌 사회의 지배 원리와는 전혀 다른 독자적 법률이 지배하는 예외적이고 특수한 영역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둘째, 중세 도시는 토지 소유와 농업에 경제적 기초를 두었던 고대 도시와는 달리, 농촌과 사회적 분업 관계에 있는 상공업 도시였다. ... 도시는 시장을 통해 주변 농촌의 경제를 장악하고 지역 경제생활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

셋째, 도시의 주민은 신분적으로 자유로운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도시민은 자유인이고 도시는 개인적 자유와 능력을 바탕으로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지위 상승의 길이 열려있는 역동적 사회라는 사실이 ... 농노들을 도시로 유인하는 주요인이었다. ...

넷째, 중세 도시는 자유로운 시민들의 서약 공동체였다. ... 중세 도시에서 시민이란 곧 서약자였다. ... 이른바 도시 영주라고 하는 지배자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조합을 결성해서 공동체를 이루는 수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11세기부터 상인들의 주도 아래 서약 공동체가 성장했다. ...

다섯째, 중세 도시는 영주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독자적인 도시법에 기초한 자치 도시였다. ... 도시 영주의 이런 봉건적 지배 아래서는 도시민의 자유로운 직업 활동과 재산권 행사가 보장될 수 없었다. 그래서 도시민은 이를 보장할 수 있는 정치권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 확보 방법으로 도시민들은 화폐를 필요로 하는 도시 영주에게 금전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영주의 이런 권리들을 매수했다. 매수할 수 없는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영주와의 유혈 투쟁을 통하여 도시의 자치권을 획득했다. ...

마지막으로 중세 도시의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도시 안의 길드 조직이다. ... 대체로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상인 길드가 먼저 결성되고 그로부터 별도의 수공업자 길드가 생겨나서 직종별로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 (길드는) 상호부조와 친목을 목표로 하여 생겨난 공제조합적‧친목적 성격의 단체였다. ... 조합원 사이에 경쟁을 배제하고 이윤 획득의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하기 위해 상품의 생산과 유통 과정을 강력히 단속하는 규제 단체적 성격을 띠게 했다. ...

(서양사강의, pp.175-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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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0일 토요일

훈구와 사림의 교체

훈구와 사림의 대립에 대하여 이들을 서로 다른 사회계층으로 간주하고, 그 연원을 고려 말로 소급해서 추적하면서, 사림 세력이 15세기 내내 중앙 정부의 집권력 강화에 저항해 왔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리하여 사림 세력이 거듭되는 사화에도 불구하고 선조대 정계를 장악한 것을 '지배세력의 교체'로 간주하고 '성리학(性理學)'과 '중소지주의 승리'라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강력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중종대 이후의 소위 '사림' 세력 가운데는 이전의 '훈구' 세력의 후예가 많고 경제적 기반도 대지주 출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실증적 성과에 기초한 것이다. 따라서 '훈구'에서 '사림'으로 '지배세력'이 '교체'되었다는 통설은 제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이 자신의 경제적 기반과는 별도로 중소지주적 지향을 강하게 내보였고, 특히 사상적으로 성리학 내지 주자학 정치사상을 더 철저하게 구현하려는 정치세력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 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문제는 왜 15세기 말이 되어서야 '사림'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였나는 점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당시의 농업 생산력 발전 단계와 함께 수조권(收租權) 분급제의 소멸과 지주제의 전면적 부상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는 추론이 나오고 있다.

사림 세력의 등장과 함께 언론 삼사의 위상이 제고되고 전조(銓曹) 낭관(郎官)의 통청권과 자대제가 확립되어 이들 부서가 명실상부한 청요직(淸要職)으로 부상한 것은 권력 구조상의 중요한 변화였다. 그리고 정치참여층이 확대되고 공론정치의 원칙이 확립된 것은 중세 정치의 발전으로 간주되었다.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上, pp.367-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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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와 백련결사

백련사 또한 수선사와 비슷한 시기에 결성되어 불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신앙결사였다. ... 초기에는 지역의 토호층이나 일반민, 그리고 지방관의 배려로 유지 발전하였으나, 1230년대 이후 최우 및 그와 밀착한 중앙관직자, 문신관료층의 지원과 관심으로 크게 번창해 갔다.

백련결사를 결성한 요세(1163~1245)의 사상은 지눌의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요세의 사상은 법화삼매참(法華三昧懺)천태지관(天台止觀)정토구생 (淨土求生)으로 요약할 수 있다. 법화삼매참을 통해 죄와 업장을 참회하고 없애며, 본격적인 천태교관법을 행할 것이며, 정토에 태어나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참회와 정토를 강조하는 데서 요세가 복잡한 이론보다 종교적 실천을 수반하는 신앙체험에 중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요세가 참회를 강조한 것은, 교화의 대상을 막중한 죄를 지어 자력으로는 도저히 해탈할 수 없는 가련한 중생으로 생각했던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은 지눌이 최소한 '지해(知解)' 정도를 갖고 스스로 발심할 수 있는 의욕적인 인간, 보살에 가까운 인간을 염두에 두었던 것과 구별된다.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上, pp.27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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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9일 금요일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進三國史表) 중에서 - 김부식

進三國史表

以爲今之學士大夫, 其於五經諸子之書, <秦><漢>歷代之史, 或有淹通而詳說之 者, 至於吾邦之事, 却茫然不知其始末, 甚可嘆也.

...

是以君后之善惡, 臣子之忠邪, 邦業之安危, 人民之理亂, 皆不得發路以垂勸戒. 宜得三長之才, 克成一家之史, 貽之萬世, 炳若日星.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

그리하여, 지금의 학자와 관리들 가운데 오경 제자의 서적과 진‧한의 역사에 대해서는 정통하여, 이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우리 나라의 사적에 대해서는 그 전말을 알지 못하니 이는 심히 개탄할 일이라고 생각하시게 되었습니다.

...

이리하여 임금과 왕후의 선악, 신하의 충성과 간사함, 국가 사업의 평안과 위기, 백성의 안녕과 혼란에 관한 사실들이 후세에 교훈으로 전하여질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재능와 학문과 견식을 겸비한 인재를 찾아 권위있는 역사서를 완성하여 자손만대에 전함으로써 우리의 역사가 해와 별같이 빛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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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8일 목요일

조선 태조 즉위 교서

洪武二十五年七月十六日乙未,
都評議使司及大小臣僚合辭勸進曰;
홍무 25년(1392) 7월 16일 을미일에
도평의사사와 대소신료들이 함께 의논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기를

王氏自恭愍王無嗣薨逝, 辛禑乘間竊位,
有罪辭退, 子昌襲位, 國祚再絶矣.
왕씨는 공민왕이 아들 없이 죽은 뒤 신우가 틈을 타서 왕의 자리를 가로챘고
그가 죄를 짓고 물러난 뒤 그의 아들 창이 이어받음으로써 국운이 다시 끊어졌습니다.

幸賴將帥之力, 以定昌府院君權署國事,
而乃昏迷不法, 衆叛親離,
다행히 장수들의 힘으로 정창부원군으로 하여금 임시로 나랏일을 보게 하였으나
곧 사리에 어둡고 법도를 지키지 않아 인심이 돌아서고 친척들까지 멀어지니

不能保有宗社所謂天之所廢,
誰能興之者也.
종묘와 사직을 보전할 수 없었으니 이는 하늘이 버리는 것을
그 누구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社稷必歸於有德 大位不可以久虛.
以功以德, 中外歸心, 宜正位號 以定民志.
사직(나라)은 반드시 덕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이고 왕의 자리는 오래 비워둘 수 없습니다.
공과 덕으로서 중앙과 지방의 인심이 모이는 분으로서 왕의 자리와 칭호를 바로잡아서 민심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予以涼德, 惟不克負荷是懼, 讓至再三,
僉曰: "人心如此, 天意可知. 衆不可拒, 天不可違."
執之彌固, 予俯循輿情, 勉卽王位.
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이 책임을 능히 짊어질 수 없을까 근심하여 두세 번 사양하였으나,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요청도 거절할 수가 없으며 하늘의 뜻도 거스릴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이를 고집하기를 더욱 굳게 하므로 나는 여러 사람의 의사에 따라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國號仍舊爲高麗;
儀章法制, 一依前朝故事.
나라 이름은 이전대로 고려라고 하고
의식과 제도도 한결같이 전 왕조의 전례에 의거할 것이다.

(조선 태조 즉위 교서 中, 태조 원년(1392) 7월 28일 정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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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병호제와 둔전제, 그리고 인재 등용

조조[, 155~220]를 지지하던 호족들은 부곡部曲이라 불리는 사병집단과 빈객賓客이라 불리는 가신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정부가 일반 민호로부터 병력과 세역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조는 병호제兵戶制둔전제屯田制를 실시했다.

병호제란 병력의 확보를 위해 모병과 투항병을 중심으로 세습적으로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제도를 말한다. ... 쉽게 말하면 상앙변법 이래 채택되었던 병농일치의 제도가 병농분리의 제도로 바뀐 것이다. 이 제도는 이후 오와 촉에서도 실시되고, 남북조를 통해 실시되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병호의 신분은 저하되었다.

그리고 전란으로 토지 황폐화와 군량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채택한 것이 둔전제이다. 둔전이란 국가의 토지로서, 둔전의 경작자는 일반 주군민 중에서 모집하거나 피정복민을 강제로 이주시켜 확보했다. 둔전민에 대한 토지의 지급면적은 1호당 100무畝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되며, 호족의 토지를 소작할 때와 비슷하게 수확의 50~60% 정도를 국가에 바쳐 이를 군량으로 확보했다. 이로써 유민의 생활 안정과 안정적인 군량 확보를 할 수 있게 되어 ...

조조는 인재의 등용에 있어서도 유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명사의 추천에 의하여 관리가 되는 후한의 방식을 버리고 오로지 재능만 있으면 발탁하는 등용법을 채택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p.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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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발생 조건

우선 파시즘은 직접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이다. 이 운동의 초기 추종자는 그 대다수가 전선에서 싸운 군인들이었다. ...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그 사이 고도로 기능화된 산업사회에서 경제적‧사회적 재적응의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 초기의 파시즘은 내란의 모습을 띠고 시작되었고, 그런 만큼 대다수의 파시즘 운동은 독일의 돌격대나 이탈리아의 검은 셔츠단 등과 같은 군대식 조직 방식을 외형적으로 드러냈다.

둘째, 파시즘의 성장은 경제‧사회적 변동과 연관지어 고찰되어야 한다. ... 자본주의적 산업사회가 겪은 최대의 위기였던 1929~1934년의 경제 위기[대공황]는 이에 대해 가장 적게 대비하고 있었던 계층들에게 물질적 궁핍과 심리적 위기감을 심어주었다. 파시즘은 등장과 동시에 '반자본주의'와 '반사회주의'를 동시에 표방했기 때문에 독점자본의 횡포와 사회주의자의 책동을 증오하던 모든 계층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중의 전선 형성은 현실 정치 어디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파시즘은 양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종국에는 우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 나치의 집권을 도왔던 1932년의 선거에서 중요한 득표 기반을 제공한 것은 바로 이들 중산층이었다는 것이다. ... 나치당의 성공은 그들의 뛰어난 선전과 조직 활동보다는 전통적인 부르주아 정당의 분열과 무능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셋째, 파시즘 운동은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적 국가의 기반 위에서 성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파시즘 운동은 대중운동이 허용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이 있어야 성립할 수 있는 동시에, 의회정치의 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서양사강의, pp.582-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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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최초의 '총력전'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은 최대한의 인적‧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통제해야 할 필요성을 부각시켜, 국가와 사회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도와 형태는 다르지만, 각 참전국들은 전쟁의 수행을 위해 전시 집산 체제를 운영했고, 이것은 사회의 여러 분야에 대한 국가 간섭의 급격한 증대를 가져왔다. 전후에 평시 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을 때에도 이러한 경험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19세기적인 자유방임의 논리가 심각한 수정을 겪지 않을 수 없었고, 부르주아 유럽은 그 자체의 존립을 위해 내부적으로 재편성‧재조직되면서 재충전의 작업을 서둘러야만 했다. 동시에 이 전쟁을 고비로 유럽이 그동안 누려왔던 비유럽 지역에 대한 우위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서양 자본주의의 중심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대서양 저편의 미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비유럽 지역의 식민지에서는 민족주의와 급진 이념이 결합하면서 유럽의 지배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높이기 시작했다.

...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은 유럽의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지만, 유럽 제국과 식민지간의 관계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 지배-종속의 정치적 고리는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었다. 패전국 독일의 식민지는 승전국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게 거의 승계되었고, 이들 제국들은 식민 지배의 고삐를 포기할 의도를 보이지 않았다. ...

... 정치적 굴레가 사라진 후에도 자본주의 체제는 다국적기업과 같은 새로운 장치를 통해서 '국제적 분업'을 정교하게 발전시켜 왔다. 그 결과 옛 식민 지역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선진 자본주의 지역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고, ...

(서양사강의, pp.51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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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와 국가사회주의

187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수반하여 사회주의 세력이 신장되었다. 사회주의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비스마르크는 1875년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사회민주당'이 결성되자, 좌파 급진주의자들의 두 차례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을 기화로 1878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보수파의 승리를 확보한 뒤, 사회민주당을 불법 단체로 선언하고 노동조합, 소비자 협동조합, 각종 교육단체를 탄압했다(그러나 사회주의자의 하원 진출은 허용했다). 융커는 반사회주의적이었고, 선거에서 패배한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탄압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체제 유지를 위해 일방적인 탄압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선거에서 노동자들의 표를 확보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이완시키기 위해 그는 1883년 의료보험, 1884년 상해보험, 1889년 퇴직 보험 같은, 당시에 '국가사회주의'로 불린 온정주의적이고 '강제적인' 사회입법을 통하여 보수주의적 질서를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1870년대 이후 불황기에 노동자들은 선거에서 지속적으로 사회민주당을 지지했다. 사회민주주의의 급속한 성장은 비스마르크 체제의 쇠퇴의 한 징후였다.

(서양사강의, pp.429-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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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7일 수요일

백제 개로왕의 국서

延興二年 其王餘慶始遣使上表イ曰 臣與高句麗源出夫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輕廢隣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須整旅電邁 應機馳擊矢石暫交梟斬釗首 自爾以來 莫敢南顧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强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是滅亡之期 假手之秋也 且高麗不義 逆詐非一或南通劉氏或北 約蠕蠕 共相脣齒 謀凌王略

연흥(延興) 2년(472) 그 나라 임금 여경(餘慶-개로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고 표(表)를 올렸다. ... 가로되 신(臣)과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윗대 때는 옛 정을 두터이 여겼지만 그 할아비 쇠(釗)는 이웃 간에 우호(友好)를 가벼이 던져버렸습니다. 쇠(釗, 고국원왕)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제 땅으로 넘어 오자, 신(臣)의 할아버지 수(須, 近仇首王)가 군대를 가지런히 한 다음 벼락처럼 달려갔습니다. 틈을 보다가 한숨에 달려가 치니 화살과 돌이 잠깐 동안 어지러이 날아다녔습니다. 드디어 쇠(釗) 머리를 베어 높이 매다니 그때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습니다. ... 지금 련(璉, 장수왕)이 죄를 지어 나라는 아주 엉망이 됐고 대신(大臣)과 큰 가문들은 죽음을 당해 모두 사라질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죄와 악이 차고 쌓여 백성이 허물어지고 흩어졌습니다. 지금이 바로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요, 남 손을 빌릴 때입니다. ... 또 고려(高麗)는 의롭지 못한 나라여서 천명을 거스르고 사람을 속인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가끔 남쪽으로는 유씨(劉氏, 송나라)와 사신을 주고 받고, 또 북쪽으로는 유유(蠕蠕)와 동맹을 맺습니다. ... 고구려가 송(宋), 유유(蠕蠕)와 서로 입술과 이빨 같은 관계를 맺고 (북위) 임금님 땅을 침범하려는 잔꾀를 부리고 있습니다.

[위서(魏書) 卷 100 열전(列傳) 88, 百濟 개로왕(蓋鹵王, 제21대 王, 재위 455-475) 기사]

 

臣與高句麗源出夫餘

  •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夫餘에서 나왔다. 『위서魏書』 [뿌샘, p.145]
  • 백제의 선조는 고구려국 출신이다. 『수서』권 81, 「동이열전」, 백제 [뿌샘, p.145]
  •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하였다(기원전 37).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p.37]
  • 백제는 고구려 주몽의 아들로 알려진 온조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의 하남 위례성에 정착한 후 마한 소국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p.47]
  • 백제국을 세운 온조집단은 부여족 계통으로서 고구려에서 이동해 와서 한강유역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부여족의 전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부여씨를 칭하였다. 이 점은 한강유역에 고구려 계통의 돌무지 무덤이 존재하고 있다든가,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다”(臣與高句麗源出夫餘)고 한 사실-『위서』백제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길사 한국사, p.3, p.31]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强族 戮殺無已

  • 장수왕 63년(475) 9월에 왕이 군사 30,000을 이끌고 백제에 침입하여, 백제왕의 도읍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백제왕 부여경夫餘慶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6 [뿌샘 1권, p.235]
  • 고구려는 6세기에 이르러 안장왕이 피살되고(531), 안원왕(531~545) 말년에는 귀족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대립과 싸움이 일어나 내부 분란에 빠졌다. 장수왕이 79년이나 장기 집권하면서 지배 세력이 바뀌지 않아 생긴 여파였다. 내정이 어지러워지면서 국력은 약해졌고,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잃었다. ... 고구려가 내부 분란을 수습하고 왕권의 안정을 되찾은 것은 평원왕(559~590)대였다. [뿌샘 1권, p.255]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북위에 사신을 보내었으나 동맹을 맺는데 실패

  •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427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남진 정책을 더욱 밀고 나갔다. ... 고구려의 침략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은 백제였다. 이에 백제는 472년(개로왕 18) 중국의 북위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청하였으나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고구려는 475년(장수왕 63) 3만의 대군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붙잡아 죽이니 이에 백제는 서울을 남쪽의 웅진熊津으로 옮기게 되었다. ...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의한 한성 함락과 웅진 남천은 백제에게 커다란 시련을 안겨준 것으로 무엇보다도 한강 유역의 상실은 백제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왕권의 실추와 眞氏·解氏 등 왕비족의 창궐은 백제의 내부적 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이 때부터 백제는 다난한 시기를 겪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백제의 부흥을 꾀한 이는 동성왕(479~501)이었다. 그는 신라의 왕족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침략에 대한 백제·신라의 동맹관계를 굳게 하고 또 종래의 외척세력을 배제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려는 의도에서였다. ... 이때 백제의 국력이 내외로 크게 신장되고 있었음은 무령왕(501~523)이 중국 남조의 양梁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강화하고 양으로부터 寧東大將軍의 관작을 받은 것에서 엿볼 수 있다. [한국사통론, pp.85-86]

 

고구려의 대중국정책

  • 고구려는 중국세력과의 대립을 통하여 더욱 국세를 신장시켰다. 동천왕(227~248)은 중국이 위魏·촉蜀·오吳 삼국으로 분립하자 이들의 대립관계를 이용하여 오와 친교를 맺었고 왕 16년(242)에는 중국과 낙랑을 연결하는 서안평을 공격하였다가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오히려 수도까지 함락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천왕(300~331)은 그 뒤 중국이 북방민족들의 침입을 받아 5호 16국의 혼란기로 접어들게 되자 끝내 서안평을 점령하였고, 이어 낙랑군을 공략하여 우리 나라 안의 중국세력을 완전히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313). [한국사통론, p.77]
  • 평양천도 후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와 두루 교통하여 그의 압력을 배제하면서 남하정책을 강행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장수왕 21년(433)에 백제와 신라가 동맹관계를 맺은 것은 이러한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한국사통론,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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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일통삼한(一統三韓) 의식의 형성

일통삼한 인식은 신문왕 12년(692)에 당(唐)이 요구한 무열왕의 묘호인 '태종(太宗)'의 개칭에 대한 회답 속에 나타나고 있다.

"... 선왕 춘추도 자못 어진 덕이 있었고, 더구나 생전에 어진 신하 金庾信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에 힘써 삼한을 통일(一統三韓)하였으니, 그의 공적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 ..." [삼국사기 卷8, 신라본기8 신문왕 12년]

무열왕의 묘호로 '태종'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로 일통삼한, 즉 삼국통일의 달성이라는 공적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그러면 무열왕 때 이미 일통삼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 이렇게 보면 문무왕대 고구려를 멸한 이후 '일통삼한' 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태평에 이르지 못했다'는 김유신의 말에서 고구려의 멸망이 곧 삼국통일의 완성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문왕 6년(686)에 세워진 「청주 운천동 사적비(寺蹟碑)」 속에 '民合三韓而廣地'라는 구절이 있어 신문왕대에는 일통삼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보다 1년 전(685)에 신문왕은 백제와 고구려 옛 땅, 원신라 지역에 각각 3개의 주(州)를 두어 전국을 9주로 정비했다. 9주는 곧 천하를 의미하는 것으로 통일의식을 과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왕 7년(687)에 고구려‧백제민과 말갈인으로 조직한 9서당(誓幢)의 완비 또한 이러한 의식을 강조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일통삼한 의식은 문무왕대 당군을 축출하여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함으로써 형성되기 시작해, 이후 신문왕대에 강조되면서 신라인의 의식으로 자리잡아갔다고 하겠다. 최치원은 고구려는 마한, 백제는 변한, 신라는 진한의 계승국으로 보았는데, 이는 삼한과 삼국을 일치시켜 보는 인식이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음을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박미선, 「일연(一然)의 신라사 시기구분 인식」, 『역사와 현실 70』, pp.16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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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발 산업국가들의 산업혁명 따라잡기와 영국 추월

1870~1914년에는 후진국들이 선진국들을 따라잡는 경향이 나타났을 뿐 아니라, 독일, 미국과 같은 일부 후발국들이 선발국인 영국을 제치고 선두에 나섰다. ... 19세기 말 미국과 독일에서는 새로운 강철 제조 기술, 근대적 화학 기술, 자동차, 전기 산업 등 새로운 기술과 산업이 발전했는데 이를 '제2차 산업혁명'이라고 한다.

제2차 산업혁명이 1세기 전 영국의 산업혁명과 달랐던 것은 생산기술 발전이 근대 과학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진행되었다는 데 있다. 영국의 숙련공들이 주로 작업 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기술을 습득했던 것과는 달리 독일과 미국에는 체계적인 과학 기술 교육을 통해 훈련된 기술자, 숙련공들이 존재했다. 이들이 근대 과학 지식을 응용해서 새로운 생산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제2차 산업혁명을 이룩한 것이다.

최초의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영국이 제2차 산업혁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했다. 가령 미국과 독일에서는 19세기 말 공업화가 진전되고 빠른 속도로 도시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전기 가로등이 활발히 건설되었는데, ... 이미 가스등을 가지고 있던 영국에서는 많은 비용을 들여 기존의 가스 가로등을 파괴하고 다시 전기 가로등을 건설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영국에서는 전기 산업 시장이 미국이나 독일 같은 신흥 공업국에서처럼 빠른 속도로 성장하지 못했고 이는 전기 산업 발전을 둔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서양사강의, pp.387-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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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6일 화요일

극화수업

극화수업이란 줄거리를 가진 극의 형태로 진행되는 수업이다. ... 극화수업은 학생의 조직에 따라 크게 세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학급에서 극화수업 연기자를 뽑아 수업하는 방법, 학급의 모든 학생들을 모둠으로 나누어 모두 똑같은 극을 만들여 참여하게 하는 방법, 학급의 모든 학생들을 모둠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극을 만들어 참여하게 하는 방법, 즉 주제를 몇 개의 소주제로 나누어 연극을 준비하는 '협동식 연극수업'이다.

극화수업을 할 때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어떤 형식으로 극화수업을 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학습 목표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극의 형식에 따라 극에서 다루는 내용은 물론 그 내용을 구성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 어떤 극으로 구현할 것인지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흔히 극화수업하면 추체험을 떠올린다. 그런데 모든 극을 통해서 추체험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습 목표에 적절한 극의 선택은 극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

둘째, 극화수업의 대본은 학생들이 써야 한다. 기존의 대본을 극화하는 것은 역사 수업이 아니라 연극 수업이다. ...

셋째, 극화수업은 극을 준비하는 과정, 실연하는 과정 못지않게 후속 토의와 평가 과정이 중요하다. ...

(역사교육의 내용과 방법, pp.23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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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식 역사 수업의 유용성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가르치면 다음과 같은 점에서 유용하다. 첫째, 역사 이야기는 그 자체로 역사의 문화적 틀인 동시에 아동에게 친숙한 방법이며 역사가들도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역사를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적합하다. ...

둘째, 이야기는 서술 형식일 뿐 아니라 역사적 사고력에 적합한 인지 도구 내지는 사고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학생들은 과거에 관한 이미지를 쉽게 구축할 수 있다. 등장인물과 갈등 구조를 통해 학생들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학습자는 역사적 사건을 연대순으로 이해하며 시간의 연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

셋째, 이야기는 맥락적 이해에 도움이 된다. 이야기는 다양한 내적 관계들의 총체를 단일한 전체로 나타내는 것이므로, 이야기를 접하고 난 후 인물의 행위와 배경을 알 수 있고, 이를 종합해 상황을 맥락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넷째, 이야기는 학생들이 자신과는 다른 시대‧사람‧관점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며, 역사적 인물의 입장에서 그 인물을 통찰하게 해준다. ... 과거의 상황을 상상하고 거기에 감정이입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교육의 내용과 방법, pp.220-221)

몽골제국의 정복사업 기반

(몽골의) 대정복사업이 가능했던 것은 우선 압도적으로 강대한 군사력 때문이었다. 그 기반은 천호‧백호제 및 이를 기초로 구성된 약 1만 명의 케식(Keshig)이라는 친위대의 무력 덕분이었다. 천호장千戶長이나 백호장百戶長은 부족회의에서 선출된 부족장이나 씨족장과는 달리 칭기즈칸 개인에 대한 충성이 강했던 군사조직이었다. 그러니 오로지 몽골족의 엄청난 무력에 의해서만 정복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를 뒷받침해준 것은 당시 아시아의 내륙 대상로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슬람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몽골군에 대해 군수물자를 보급하고, 적정에 대한 첩보활동을 했으며, 외교사절의 역할을 하는 등 다방면에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몽골의 무력에 의존한 안정적인 대상로의 확보가 그들의 목적이었으며 양자의 이해가 맞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몽골군은 정복과정에서 엄청난 인명을 살상했을 뿐만 아니라 정복한 도시에서 많은 약탈을 자행했지만, 제국 건설의 기초가 되는 전문 직능인은 철저히 확보했다. 또한 몽골족의 서아시아 정복으로 인해 이슬람과 페르시아계의 결합을 가져와 원조元朝의 중국 지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p.23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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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 문신관료제와 취약한 군사력

송대는 경제‧문화면에서 이전 시대에 뒤지지 않는 역대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지만 내륙아시아의 거린족, 여진족, 몽골족 및 티베트족 부족민들의 중국 내부로의 침입과 정복 역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왜 송조는 이들과의 무력대결에서 계속 취약점을 보였는가? 그 원인 중 하나는 무거운 국방비의 부담을 진 관료제도와 군사제도가 성립된 데 있었다. 게다가 문치주의적 문신관료제가 성립되면서 쿠데타의 가능성을 가진 무인 세력을 철저히 견제했고 과거제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 이러한 정책과 분위기는 송조를 군사적으로 허약한 상태로 만들어 놓았고 결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또 한 가지는 자신의 적에 대한 정보에 어두웠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진‧한과 수‧당 왕조는 교역과 사절을 통해 끊임없이 내륙아시아의 권력구조에 개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열된 부족 내에서 자신의 동맹자를 구하고, 강한 부족들끼리 서로 싸우도록 만드는 수법, 즉 이이제이以夷制夷메 매우 익숙했다. 따라서 북송과 남송이 보인 외교적인 어리석음은 내륙아시아의 민족들과 접촉을 갖지 못한 채, 정복왕조의 등장이라는 내륙아시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데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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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 도시화의 진전과 대중문화의 출현

문화사적 측면에서 1920년대 후반은 근대문명의 터전인 도시를 중심으로 이른바 식민지 근대성이 그 모습을 드러낸 시기였다. 이 무렵 식민지 지배의 여러 가지 인프라가 갖추어지고 이식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림에 따라 도시화가 진전되고, 자본주의적 소비풍조와 대중문화가 나타났는데, ...

그런데 식민지시기의 도시화는 일차적으로 식민통치의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는 과정이었다. ... 일제는 항만과 철도교통의 요지에 신흥도시를 건설하여 전통도시를 제압하려 하였다. ... 전차가 대중교통수단으로 구실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이후였다. 더불어 1928년부터 버스가 운행되어 대중교통 수단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자동차가 거리의 풍경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를 잡았다. ...

도시경관의 변화와 함께 1920년대 후반 서울은 근대적 소비도시로 탈바꿈해 갔다. 생산기반은 취약했지만 이식된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일상을 재조직하기 시작하면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상징인 백화점이 대중의 소비욕구를 자극했고, '모던보이' '모던걸' 등의 등장과 함께 양식당‧카페‧다방‧극장과 같이 의자 위에서 이루어지는 도시적 생활이 연출되었다. ...

1920년대 중반 신파극 주제가같은 유행창가들이 하나씩 음반화되면서 모습을 드러낸 대중가요는 1926년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이 노래한 <사의 찬미>가 전에 없는 히트를 치면서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下, pp.25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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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5일 월요일

유럽의 가격혁명

16세기의 가격 상승(이른바 가격혁명)을 초래한 결정적 요인으로 흔히 신대륙의 귀금속 유입을 지적할 수 있다. 신대륙으로부터 금과 은이 대량 유입됨으로써 화폐량이 증가했으며, 이것이 가격 상승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 그러나 가격 상승 현상은 신대륙의 귀금속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이전부터 나타났는데, 이것은 인구 증가화폐 유통 속도의 증가 또한 화폐랑 못지않게 가격 상승의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알려준다. 인구 증가 시기에 수요 증대 및 시장의 확대와 더불어 생산자들 사이의 사회적 분업이 촉진되었고, 다양한 방식의 상품 생산이 한층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귀금속의 유입은 가격 상승을 더욱 가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격 혁명은 사회 내의 여러 집단에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생산이나 유통 부문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 가운데 혜택을 입은 부류가 있었고, 빈농은 더 가난한 상태로 떨어졌으며, 대토지 소유자들 중에서 자기 과시적인 낭비에 탐닉하던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토지를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격혁명이 사회의 특정 집단에게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다른 집단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분명한 것은 가격 상승 현상이 농업과 수공업, 두 부문에서 시장 지향적인 성격을 강화하고 나아가 자본주의의 발전 또한 촉진했다는 사실이다. 17세기 가격 하락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던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이러한 발전이 두드러졌다.

(서양사강의, pp.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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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4일 일요일

위클리프와 후스, 종교개혁의 씨앗

기존의 교회 조직을 비난하며 새로운 교리를 내세우는 이단자와 이단 조직에 대하여 정통 기독교회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특히 이들이 세속 영주에 의해서 보호되면 교회 법정은 속수무책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였는데, 옥스퍼드 신학자였던 그는 기존 교회의 교리와 정치적 기반을 공격했다. 그는 성사의 가치는 그것을 행하는 사제의 인물됨에 따르고[범법 사제 성사 거부], 영성체에서 예수는 오직 정신적으로 나타나며[화체설 공격], 면죄부는 무용한 것이고 구원은 개인적 공적보다는 신성한 예정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교회의 부와 사치를 공격하고 현세의 일에 대한 교회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위클리프의 설교는 당시 교회와 대립하던 영국의 군주와 귀족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 같은 이유로 롤라드파(Lollards)로 알려진 그의 추종자들은 헨리 5세(1413~1422) 때에 이르러서야 국가에 의해서 큰 탄압을 받았다. ... 프라하에서 위클리프 가르침의 선두 지지자는 후스(Jan Hus, 1373~1415)였는데, 그는 매우 인기 있는 젊은 사제이며 설교자로서 면죄부를 공격하고 교회의 예배 의식과 도덕률의 개정을 요구했다. ... 후스는 교회에서 파문당하고 대학의 교수 직도 박탈당했다.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하여 콘스탄스 공의회에 참석했던 후스는 거기서 이단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아 말뚝에 묶여 화형당했다. ... 16세기 종교개혁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자신도 후스의 추종자라 선언했다. 후스의 화형과 함께 종교개혁의 씨앗도 싹텄던 것이다.

(서양사강의, pp.21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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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해외 독립 운동 단체

지역

단체

특징

북간도(동만주)

중광단

대종교에서 설립 주도

북로 군정서

김좌진, 군사 단체

서전서숙

명동학교

민족교육기관

삼원보(남만주)

경학사

부민단

자치기구

신흥 학교(신흥 무관 학교)

군사 학교

밀산부(북만주)

한흥동

독립군 기지

연해주

권업회

신한촌에 설립

대한 광복군 정부 설립

대한 광복군 정부

임시 정부

대한 국민 의회(전로 한족 중앙회)

임시 정부

미주

대한인 국민회

박용만, 안창호, 이승만

대조선 국민군단

박용만, 군사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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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의 실패

The French army's methods as we have seen assumed rapid campaigns in areas sufficiently wealthy and densely peopled for it to live off the land. But what worked in Lombardy or Rhineland, where such procedures had been first developed, and was still feasible in central Europe, failed utterly in the vast, empty and impoverished spaces of Poland and Russia. Napoleon was defeated not so much by the Russian winter as by his failure to keep the Grand Army properly supplied. The retreat from Moscow destroyed the Army. Of the 610,000 men who had at one time or another crossed the Russian frontier, 100,100 or so recrossed it.

(Eric Hobsbawm, «The Age of Revolution», VINTAGE BOOKS, 1996,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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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3일 토요일

포스트모던 역사학과 기억 연구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록이며, 과거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과거가 곧 역사는 아니듯, 과거에 대한 기억 모두가 역사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이것은 역사가 수많은 기억 중에서 선택되어진 것이라는 뜻이며, 바로 여기에서 역사가 가지는 권위와 독점의 문제가 발생한다. 즉 의도되고 기록된 역사 속에 포함되지 못한 기억은 그대로 잊혀지게 되며, 잊혀진 기억은 역사적 사실에서 탈락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잘못 서술하는 것만이 왜곡은 아니다. 그것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서술하지 않는것 또한 분명한 왜곡이다. 일본의 우익이 위안부 문제를 서술하려 하지 않는 것, 우리의 역사가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의 행동에 대해 서술하지 않는 것 등이 그 예이다.

포스트모던 역사학은 역사학의 객관성에 대한 의문 제기, 즉 역사가 객관적 실재가 아닌 텍스트임을 밝힘으로써,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넘어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의 문제에 주목하고, 사회의 지배적 담론에서 배제된 역사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며, 거시적 역사가 간과하였던 하위주체들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도록 하였다.

최근 기억에 대하여 관심이 증폭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를 소수 엘리트가 아닌 하위주체들의 몫으로 돌리기 위해, 전문적 글쓰기 훈련을 받지 못한 그들에게도 역사 서술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함이다.

-- 도그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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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백정과 정호

고려시대의 백정(白丁)은, 천민이던 조선시대의 그것과 달리, 일반민의 주류를 형성하던 존재로서 일반 주‧부‧군‧현에 거주하면서 주로 농업생산에 종사하는 농민층이었다. 이들은 조세‧공부‧역역 등 일반적인 국역 의무를 졌고 국가에 대해 특정한 직역의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백정이라 불리었다. 한편 이들 백정과 달리 국가에 대해 특정한 직역을 부담하는 층을 백정과 구분하여 정호(丁戶)라 불렀다.

... 구분 기준에서는 일반적으로 경제력, 즉 토지소유의 규모의 차이에 따라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여기에 정호는 지배신분이고 백정은 피지배신분이라는 신분의 차이까지 고려하는 견해도 있다. 일정한 경제력을 갖춘 정호층은 국가가 차정한 특정한 직역을 부담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백정층은 요역과 기타 부담 이외에 직역 부담은 지지 않았다. 이때 직역은 일반적으로 군인호‧향리호‧기인호(其人戶)‧역호(驛戶) 등이 부담하는 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上, pp.24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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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화사의 역사 서술 방법

신문화사는 마르크스와 아날학파로 대표되는 20세기 '사회사'에 대한 비판적 반성의 결과이다. 즉 "사람의 삶이 만들어낸 역사에서 사람을 찾아내서 복권시키는 것"이 바로 신문화사의 문제의식이다. 이를 위해 기존의 역사와는 다른 역사 서술의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두껍게 읽기', '다르게 읽기', '작은 것을 통해 읽기', '깨뜨리기'이다.

'두껍게 읽기'는 클리포드 기어츠의 '두꺼운 묘사'에서 파생된 개념인데, 사료를 통한 연구가 불가능한 인류학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는 역사적 자료가 보여주는 객관적 사실 이면에 숨어 있는 여러 층위의 맥락을 읽어낸다는 뜻이다. 마치 교육학에서 말하는 잠재적 교육과정(Hidden Curriculum)처럼 역사적 자료를 만든 사람이 미처 의도하지 않았지만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을 찾아본다는 것이다.

'다르게 읽기'는 전통적 관점과는 다른 맥락에서 역사를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동일한 역사적 사실도 누구의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작은 것을 통해 읽기'는 역사적 자료를 거의 남길 수 없었던 역사의 패배자, 또는 소수자의 역사를 복원해내기 위해, 빈약한 사료를 풍부하게 읽어낼 수 있도록 개발된 방법이다. 이를 '미시사'라고 한다.

'깨뜨리기'는 위의 세 가지 방법이 통합되어, 기존 역사학의 방법론과 서술 방식을 깨뜨리자는 뜻이다.

물론 이것이 역사학 자체를 아예 부정하거나 없애자는 것은 아니며, 기존의 역사학의 빛이 비추지 못했던 작은 골목들에 눈을 돌림으로써 역사학의 지평을 넓히는데에 그 의의가 있다.

-- 도그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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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집단과 家, 그리고 族

우리는 종족(宗族; Clan)이 중국 사회에서, 카스트(Caste)가 인도 사회에서, 그리고 클럽(Club)이 미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2차 집단임을 보았고, 그와 같은 2차 집단들이 친족의 지배적 관계선(dyadic dominance)의 유형에 뿌리를 두고 있음도 보았다. 곧 종족은 부자(父子) 지배와, 카스트는 모자(母子) 지배와, 그리고 클럽은 부부(夫婦) 지배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들 세 민족의 2차 집단 안에서 인간 관계의 특징은 집단 외부인과의 관계의 특징이기도 하다는 것도 보았다. 간단한 의미로 말하여, 중국인은 친구와도 친족적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고, 미국인은 그들의 부모를 마치 사업의 동업자처럼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으며, 반면에 힌두인들은 모든 인간의 상호 작용을 계급적 차이로 다루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 세 사회와 문화에 있어 친족, 2차 집단 그리고 행위적 특성 사이에는 뚜렷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 일본의 '이에'(家; household)는 중국의 '챠'(家; home)와는 다르다. 혈연 또는 혼인과 무관한 사람들도 일본의 '이에'의 성원이 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은 중국의 '챠'에서는 있을 수 없다.

일본의 '도오조꾸'(同族; corporation)와 중국의 '쮸'(族)를 비교할 때 두 사회의 차이는 더욱 뚜렷해진다. 중국의 '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족(宗族)으로서 공동 조상을 가진 후손들로 이루어진 부계 친족 집단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오조꾸'는 일종의 조합(corporation)으로서 하나의 '혼께'(本家)와 여러 개의 '분께'(分家)로 이루어져 있다. '분께'는 '혼께'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분께'에 따라서는 '혼께'와 아무런 혈연 또는 인척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또한 '분께'가 '혼께'와 혈연 관계가 있는 경우에라도 '분께' 또는 그 성원들 가운데 누군가 이주하여 갈 경우 더 이상 '도오조꾸'의 성원이 될 수 없다.

(프란시스 슈, «이에모또», pp.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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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양자제도

중국인은 상속자가 없을 경우 우선적으로 형이나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택한다. 이것이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데릴사위를 얻어 가계를 이어가게 한다. 타인을 양자로 삼는 경우는 아주 드문 상황에서 뿐이다. 양자를 얻음에 있어 중국인은 항렬을 반드시 따진다. 데릴사위는 대부분 빈곤한 집 출신이며 특히 본인과 그의 가족들은 그러한 처지를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중국인은 일본인이 나이 차이가 많은 동생을 양자로 삼는다는 것을 안다면 무척 놀랄 것이다. 수에무라라는 마을에서 35살의 가장이 15살의 동생을 아들로 입적한 경우가 있었음을 엠브리는 적고 있다(Embree, 1939: 83쪽). 이와 같은 것은 중국인에게는 생각할 수도 용납될 수도 없는 것이며 친족 체계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범법 행위로 간주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중국인에게는 전통적으로 친족의 위계 질서 안에서 개인의 위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결코 변경될 수 없다. 이러한 원칙인 인척에게도 적용되며 (일본에서 허용되는) 혼자된 숙모와의 결혼은 중국인에게는 근친상간이나 다름없다.

(프란시스 슈, «이에모또»,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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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2일 금요일

영국의 봉건왕정

영국의 노르만왕조는 정복왕조였기 때문에 유럽 대륙에 비하여 처음부터 왕권이 강대한 편이었다. ... 헨리 1세의 업적은 왕의 재판권 강화와 왕실재정의 정비였다. 헨리 1세는 국왕의 재판관을 전국에 파견하고(순회재판제의 시작) 왕실재정의 정비를 위하여 따로 재무관(exchequer)을 두고, 주장관인 셰리프(sheriff)로 하여금 1년에 2회씩 왕실의 수입과 지출에 관한 보고를 하게 하였다. ...

헨리 2세는 즉위하자마자 그 동안 세력을 신장했던 대제후를 누르고 왕권을 다시 강화하였다. ... 헨리 2세의 업적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왕의 재판권 강화와 전국적인 규모로의 확대였다. 헨리 2세는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클라렌든헌장(Constitutions of Clarendon, 1164)을 마련하고, ...... 그러나 교황으로부터 준엄한 문책을 받은 헨리 2세는 영국의 교회법정이 교황청에 소청하는 권리를 인정하는 등 양보하는 수밖에 없었다.

교회 재판권에 대한 통제는 실패하였으나, 일반 법정에 대한 왕의 재판권 강화와 확대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즉, 헨리 1세 때 시작된 순회재판제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 강화되고, 배심제가 확립되었다. ... 그리고 또한 봉건제후의 법정에서의 판결에 불만인 경우 왕립법정에 상소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러한 헨리 2세의 재판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영국의 특유한 보통법(common law)이 발전하게 되었다. 보통법의 뜻은 전국에 적용되는 법, 즉 왕국의 모든 사람과 모든 지역에 공통되는(common) 법이라는 것이다.

(서양사개론, pp.21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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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도시의 코뮌운동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 활동의 성질상 봉건적 지배로부터의 해방, 즉 자유과 자치권을 원하였다. 이러한 자유와 자치권의 획득은 평화롭게, 즉 돈으로 사는 경우도 있었으나, 많은 경우 힘으로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러기 위하여 도시민들은 서로 서약(conjuratio)으로 단결하고 코뮌(commune)을 형성하였다. ... 이리하여 봉건귀족을 배제한 이른바 북유럽형과, 봉건귀족과 상공인이 존재하는 남유럽형의 구별이 생겨났다.

대부분의 도시가 12세기 중엽까지는 자유와 자치권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특허장(Charter: Privilegien)으로 문서화되었다. 그 내용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것은 신분의 자유경제활동에 필요한 여러 자유였다. 신분의 자유는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Stadtluft macht frei.)는 말과 같이 도시가 갖는 지역적인 특권으로서 도시 내에 1년과 1일을 거주하면 그 이전의 신분과는 관계없이 누구든지 자유로운 신분이 될 수 있었다. ...

중세도시는 자유와 더불어 영주재판권이나 교회법으로부터 해방되어 독자적인 재판권과 사법권을 갖는 특수한 법적 구역이 되고, 시참사회(concilium: curia)라는 독자적인 행정기관과 시민군 등을 갖는 자치체가 되었다.

(서양사개론, pp.21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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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니 전쟁 2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241)은 시칠리아섬의 쟁탈전이었으며, ... 로마는 또한 이탈리아를 통일할 때와는 달리 새로 획득한 시칠리아를 동맹자로 취급하지 않고, 이를 속주(Province)로 만들어(B.C. 227) 생산물의 1/10을 공납으로 징수하고, 이를 위하여 징세청부제도를 도입하였다. 앞으로의 제국조직의 기본적인 틀이 마련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는 그 후 북부 아프리카나 이집트와 더불어 로마의 곡창 역할을 담당하게 되고, 라티푼티움(latifundium)으로 알려진 로마의 대농장 경영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202)은 ......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Hannibal)이 ...... 침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 한니발은 로마의 연패가 이탈리아 내의 '동맹자'들의 이탈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하였으나 그러한 현상은 부분적인 것으로 그쳤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의 결속은 견고하였으며 이는 로마의 통치정책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하였다. ...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Scipio, Africanus)는 한니발의 근거지인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평정하고(B.C. 206), 카르타고의 본거지를 직접 공격하였다. ...

제3차 포에니 전쟁(B.C. 149~146)은 카르타고가 해상무역에 종사하면서 그 국력이 다시 커지는 것을 본 로마가 이를 완전히 멸망시킨 전쟁이었다. ... 전 시민이 결사적으로 항전하였으나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되고 포로는 노예로 팔렸으며, 카르타고의 과거의 영토는 아프리카라는 속주가 되었다.

(서양사개론, pp.10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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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왕조

정복왕조(Conquest Dynasties)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일 출신의 동양학자인 비트포겔(K. Wittfogel)이 사용함으로써 알려졌다. 그에 의하면 정복왕조란 중화제국 역사상 전형적인 중국왕조 외에, 이들과 항쟁하면서 때로 이들을 정복하고 지배한 요遼를 비롯해 금金, 원元, 청淸 등, 유목민족이 건립한 여러 왕조들을 가리킨다.

그는 남북조시기에 중국 내지로 이주해서 중국의 일부를 점령해 지배했던 북위 등을 침투왕조(Infiltration Dynasties) 혹은 잠입왕조라고 하여 정복왕조와 구분했다. 침투왕조가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화북지역으로 내려와 거주하다가 반평화적인 방법으로 국가를 건립하고, 이후 수 세대가 지나면서 국가가 멸망하자 중국의 문화에 흡수‧동화되어 버린 것과는 달리, 정복왕조는 장성 이북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해 중국을 일시적으로 정복했다.

따라서 10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정복왕조는 중국의 농경문화에 대항하는 유목민족으로서의 강렬한 문화적 자의식과 서방의 영향을 받은 독자적인 고도의 유목도성문화를 기반으로 해, 중국인과 중국의 문화에 대한 정복자로서의 의식이 강했다. 따라서 이들 정복왕조에서는 한민족 혹은 한문화에 동화되지 않기 위한 여러 제도적 장치들을 시행함으로써, 당연 통치구조에서도 이중성 혹은 이원성의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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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1일 목요일

서양 근현대 역사학의 변천과정

19세기 이전의 역사는 체계적인 학문이라기 보다는 문학의 분파로 취급되었다. 역사는 사회의 상류층의 취미나 교훈을 위해 배우는 것이었다. 19세기에 이르러 랑케 사학이 만들어지면서 역사학은 학문적 체계화를 갖추게 되었다. 랑케 사학은 실증주의, 객관주의, 과거주의, 절대주의, 진보주의 등의 특징을 지닌다. "사료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는 말로 대표되는 실증주의는 역사가 객관적 사료에 의해 쓰여져야 한다는 뜻이다. 객관주의는 역사가가 자신의 주관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서술할 것을 강조한다. 역사가의 임무는 사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과거주의란 역사가 과거에 있었던 것을 그래도 재구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절대주의는 역사적 진실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랑케 사학의 또다른 특징인 진보주의 역사를 계속 진보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랑케 사학은 사건 지향적 정치사를 역사 서술의 중심으로 삼았고, 그 서술 형식은 이야기체이다.

20세기에 들어 사회과학이 발달하면서 역사학에 새로운 흐름이 일어났다. 바로 사회과학적 역사학이다. 이는 랑케 사학의 방법론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20세기에 새롭게 발전한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역사학에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개별적 사건보다 과정, 구조를 밝히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랑케의 방법론은 하나씩 비판받기 시작했다. 객관주의와 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상대주의가 나타났다. 이는 객관적 진실의 존재를 부정한다. 즉 관점에 따라 진실은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는 뜻이다. 과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현재주의도 나타났는데, 이는 역사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의미있는 역사여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랑케의 정치사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 것이 사회사이다. 사회사는 정치사 중심의 역사연구를 지양하고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여러 분야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전체사를 지향한 한 것이다. 사회과학적 역사는 사회과학의 개념 규정이나 정의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야기체 역사서술 방식을 비판하고 역사를 법칙화, 유형화하여 분석하는 서술방식을 취하였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사회발전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면서 역사학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한 움직임의 대표적인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사회에서 형성된 인류사회의 발전에 대한 믿음을 부정한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도 부정되고 근대사회를 이끌어왔던 거대담론 또한 부정된다. 거대담론은 인류의 역사를 거대한 이론이나 설명틀에 맞추어 총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학문 흐름으로, 역사를 법칙적, 구조적으로 보기 때문에 개별 인간은 그 속에서 소멸해 버린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를 과학보다 문학으로 바라보며, 역사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텍스트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이에 따라 역사를 있는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비판적으로 읽게 한다. 또한 역사를 문학의 영역으로 복권하였으므로 서술방식 또한 이야기체를 부활시켰다.

신문화사 또한 새로운 흐름이다. 신문화사는 사회과학적 역사학의 거대담론에 대항하여 개별인간의 일상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기존 역사와는 다른 맥락에서, 사회적 약자의 시각에서 서술하고, 부족한 사료를 보완하기 위하여 미시사적 접근방법을 사용한다.

-- 도그마™: 역사교육론 중간시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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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말여초의 사회변동 (한국 중세사회의 성립)

936년 高麗에 의한 後三國의 통일은 新羅 末期의 극심한 혼란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다는 측면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성격을 그 이전과는 다르게 본질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이른바 한국의 古代社會가 끝나고 中世社會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와 중세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나말여초의 移行期를 거쳐 우리 사회가 어떠한 모습으로 바뀌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역사를 구분함에 있어 고대와 중세를 나누는 기준은 생산관계, 중앙과 지방의 권력관계, 그리고 身分制,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등이 있다. 이러한 기준으로 고대사회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대사회의 지배방식은 토지를 매개로 한 것이 아니라 피지배민에 대한 직접지배방식을 취한다. 즉 奴隸所有主와 奴隸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직접지배 방식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의 안정적 재생산의 어려움으로 인해, 노동력 확보를 위한 전쟁이 필수적이다. 世界史的으로 고대사회의 종말은 사회 안정으로 인한 노예 노동력의 고갈과 함께 일어난다.

둘째, 고대사회는 중앙과 지방의 권력 관계가 중앙집권적인 일방적 지방 지배의 행태를 띤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중앙집권의 뜻은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行政的으로 지배한다는 것은 아니며, 왕족 또는 귀족으로 대표되는 王京人의 관직 독점으로 인한 지방세력의 정치참여 소외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軍政的인 지배를 말한다.

셋째, 고대사회는 신분제적 면에서 볼 때,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닫힌 사회이다. 개인의 신분은 관직이 아니라 혈통에 의해 결정되며, 이러한 혈통은 개인의 능력에 따른 成就지위의 획득을 원천적으로 배제시킨다.

韓國史에서 고대사회로 분류되는 신라는 위에서 살펴본 고대국가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신라 사회는 骨品制로 표현되는 폐쇄적 신분 사회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절대적 차별을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였다. 6세기 초에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왕경인을 편제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골품제는 통일전쟁 시기까지 신라의 지배세력을 내부적으로 강하게 결집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통일전쟁으로 새롭게 확보된 대동강 이남까지의 권역은 이러한 골품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의 정세가 급속히 안정되고, 평화의 시기가 지속되면서 골품제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 토지, 노비 등의 사회적 기반은 정체되어 있음에 반하여, 眞骨 귀족의 수적 증가로 인해 지배계층이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면서, 귀족간의 분열과 경쟁이 심화된 것이다. 통일 후 武烈王系의 전제정치 하에 일시적으로 귀족의 경제적 기반인 祿邑을 폐지하고 官僚田을 운영하였으나, 中代 末 귀족들의 토지집적과 자연재해로 인한 소농의 몰락으로 국가재정이 궁핍해지면서 귀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다시 녹읍을 부활시켰다. 귀족들 간의 경제적 경쟁은 정치적 혼란, 즉 왕위쟁탈전으로 이어지고, 또 한편으로 귀족의 수탈 강화는 농민 流亡으로 이어져 잔류민의 부담이 더욱 늘어나는 등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에 신라의 지배계층은 律令의 개정을 통해 집권체제를 정비하고, 近侍機構를 강화하고 文翰機構를 통합하는 등의 왕권강화를 시도하였으나, 기득권을 양보하지 않는 귀족들의 미온적 태도로 실패하고 말았으며, 이로 인해 신라의 구조적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모순은 필연적으로 생산계급인 농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眞聖王 3년(889)을 고비로 농민의 저항은 기존의 소극적인 소규모 저항을 벗어나, 적극적이고 대규모로 조직된 농민군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농민항쟁은 이후 불합리한 收聚制度 개선에 대한 단초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농민항쟁은 후삼국의 각축전이 전개되자 점차 소멸되는 양상을 보이며, 이로써 변혁운동의 주도권이 군사력을 가진 城主 ‧ 장군 등의 유력 지방세력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른바 豪族이라 불리는 지방세력은 신라 통치제제가 붕괴되면서,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내륙의 지주층에서 성장하거나, 軍鎭에서도 나타났으며, 바다를 이용한 국제무역 종사 계층에서도 성장했다. 이들에게 신라 골품제의 가장 큰 불만 세력이며, 唐으로 유학하여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돌아온 6두품 출신의 지식인층이 가담하여 참모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중국에서 들어온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 등도 호족의 경쟁 관계와 맞물려 크게 유행하였다. 예언과 비기로 이루어진 도참사상은 민간에 퍼진 미륵신앙과 함께 경주와 신라 지배계층의 권위를 무너뜨리며 새로운 사회를 여는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이렇게 난립하던 호족 중에서, 세력을 크게 이루어 후삼국시대를 연 세력은 甄萱과 弓裔, 그리고 궁예를 이은 王建이었다. 이들은 출신 배경과 對신라 정책에 따라 서로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통일 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과, 혼인과 정복을 통해 주변의 군소 지방세력을 포섭 ‧ 흡수해가는 통일정책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었다. 왕위계승 문제로 발생한 내분으로 몰락한 견훤과, 전제주의로 인한 반대세력과의 마찰로 멸망한 궁예와 달리, 왕건은 적극적인 親신라 정책과 호족들을 아우르는 정책을 펼쳐, 마침내 935년 후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였다.

고려의 통일은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닌, 사회 성격이 바뀌는 일대 사건이었다. 고려 사회는 이전 신라 사회와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고려는 田柴科로 대표되는 負稅制度의 개혁을 통해, 사람에 대한 직접 지배방식에서 토지를 매개로 한 간접지배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제 최소한 명목적으로는 토지가 귀족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관료에게 지급되는 급료의 형태를 취한다. 景宗 1년(976)에 始定田柴科과의 시행으로 시작하여 문종 30년(1076)에 更正田柴科로 일단락된 부세제도를 통해 중세적 토지제도가 성립되었다.

둘째, 삼국에서 통일신라까지의 고대사회에서 중앙과 지방의 관계가 정복과 복속의 개념이었던 것에 비해, 고려는 지방세력의 자치에 바탕을 둔 타협적 지배방식을 택했다. 군사 요충지 외에는 지방에 상비군을 두지 않고 官人인 파견하여, 鄕吏의 지방자치를 감독하였다. 太祖 왕건은 지방세력을 포섭하고 왕실 권위를 提高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결혼정책을 펼쳤으며, 호족의 해당 지역에서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한편 그들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事審과 其人제도를 함께 시행하였다.

셋째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없었던 신라와 달리, 고려는 외형적으로는 官職의 승진에 제한이 없는 개방적 사회였다. 宗親不仕 원칙 아래 王族의 정치 참여를 배제시키고 王室內婚을 통한 凡人과의 단절을 통해, 왕은 초월적 존재가 되었다. 동시에 정치는 관료가 맡는 정치체제를 도입하였다. 唐의 제도를 수용하여 敎育과 科擧를 통한 경쟁의 제도화를 통하여, 혈통으로 결정되는 歸屬지위를 최대한 배제하여 성취 동기를 고양하고, 또한 불완전하게나마 지역차별을 해소함으로써 신분의 유동성을 확보하였다. 지방의 호족은 점차 분화되어,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인층이 되거나 자신의 거점에서 지방의 지배층, 즉 향리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고려의 체제정비는 成宗代에 유교적 정치질서를 강화함으로써 완성된다. 성종은 光宗의 호족 억압책으로 소외되었던 세력까지 포용하고, 전시과를 통한 중세 토지제도의 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신라 6두품 출신의 崔承老를 등용하여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 체제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로써 유교는 治國의 정치이념으로, 불교는 修身의 종교로 자리매김하여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었다. 이리하여 성종 이후 체제가 정비된 고려사회를 중세사회라 부른다.

-- 도그마™: 한국중세사 중간시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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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0일 수요일

시황제와 분서갱유

이러한 법가적 통치정책은 더 나아가 역사상 악명 높은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일컬어지는 사상의 통일로 발전했다. 분서란 서적을 불태워버린 것을 말하며 갱유란 자신의 통치이념에 반대하는 학자를 땅 속에 묻어 죽인 것을 이른다. 학자 중에는 진의 획일적인 법치에 불만을 품고 옛 것을 찬미하며 시황제의 정치를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B.C. 213년에 이사李斯의 건의에 따라 진의 역사서와 의약, 점복과 농업관계 이외의 서적을 몰수해 30일 내에 소각했다. 그리고 고서古書에 대해 논의하는 자는 사형, 옛 것을 찬미하고 진을 비방하는 자는 일족 전체를 죽인다는 금령을 내렸다. 이 분서령은 이미 상앙商鞅의 변법을 통해 진국 내에서 실시되던 것인데, 이를 전국으로 확대한 것이다. 그 목적은 민간 소장의 서적과 사학私學을 금지하고 그것을 관이 소장하며 관학으로 일원화하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분서령이 반포된 이후에도 수도 함양에는 여전히 유가의 경전이 소장되고 있었으며, 박사들에 의해 정리‧연구되고 있었다.

다음으로 갱유는 시황제의 신선술에의 동경이 그 계기가 되었다. 분서의 다음 해에 자신을 속인 방사方士 노생盧生에 대한 화풀이로 유학자를 포함한 460여 명의 학자들을 함양에서 파묻어 죽였는데, 이것은 학자와 학문에 대한 탄압책의 대표적인 사례였으며 후세에 시황제를 비난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p.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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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역사학의 성과와 한계, 그리고 역사의 민주화

헤로도투스 이후 서양의 역사는 왕과 영웅의 역사였고, 정치 중심의 역사, 승리자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또한 역사 서술상의 특징은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 행위 주체의 의지만이 강조되었다. 맑스주의 역사학은 역사의 변화 발전의 동력을 토대와 상부구조 간의 갈등으로 보았으며, 그러므로 역사 속의 주체의 행위는 그가 속한 물질적 토대의 규정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였다. 때문에 맑스주의 역사학은 역사학의 주된 관심을 사회 경제적인 토대에 대한 탐구로 돌렸으며, 사회를 변화‧발전시키는 갈등, 즉 계급 투쟁과 계급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를 강조하였다. 또한 역사적 인과관계를 개인의 성향의 결과가 아닌 사회를 관통하는 법칙 속에서 찾으려 하였기 때문에, 역사학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론화 작업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맑스주의 역사학은 현실에 대한 법칙적‧관념적 접근으로 인하여, "전체적인 설명에는 성공하였으나 구체적 사건의 설명에는 실패한 역사", "노동계급을 위한 역사에 노동계급은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역사"를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맑스주의 역사학이 주목한 '지배계급 중심의 역사로부터의 탈피'는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이다. 맑스주의 역사학은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 즉 계급이라는 범주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시각에서 본 역사를 발굴해서, 정말로 역사의 하위 주체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모델들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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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본질과 E.H. Carr의 의의와 한계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역사가가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었고,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그러나 역사를 '있는 그대로'라고 할 때, 인류가 살아온 모든 시간과 모든 개개인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와 평가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E.H. Carr는 이것을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정의하였다.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서술되는데, 그 출발점은 언제나 역사가의 현재 문제의식에 있다는 것이다. 역사가의 문제의식에 따라 동일한 역사적 사건도 다르게 해석되며, 선택되는 사료도 달라진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당파성이라고 말했는데, Carr가 역사학에서 가지는 의미는, 모든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객관적인 역사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역사는 당파적이며, 과거라는 실재에 대한 현재적 의미라는 것을 밝혔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Carr의 역사는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바라보는 역사, 언어로서의 역사는 아니었다. Carr는 역사의 진보를 믿는 근대주의자였으며, 따라서 역사가 일관된 흐름 속에서 발전해 간다고 믿었다. 이러한 Carr의 생각은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목적론적 역사관과 다를 바 없으며, 진보라는 거대 담론 위에서만 역사를 서술하기 때문에, 다양한 삶을 담아낼 수 없었다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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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스탈린

스탈린은 전쟁의 최종 결정권자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시아‧북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고, 동유럽에 집중해 있었다. 1949년 말 이래 아시아에서는 스탈린이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 정책을 결정한다는 소련-중국간 권위의 이양‧서열화가 이뤄졌다. 때문에 1949년 3월과 1950년 4월 김일성‧박헌영의 모스크바 방문시 스탈린의 전쟁 결정은 미국의 전쟁 불개입에 대한 보증, 북한군의 병력‧화력 우위 보증, 모택동의 원조 보증이라는 전제조건이 충족된 뒤에야 이뤄질 수 있었다. 스탈린은 전쟁에 소련이 개입한 것을 위장하는 데 주력했고, 군사 고문단의 38선 이남 월경조차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 그렇지만 소련은 개전 초기 북한군 편제‧무장‧훈련은 물론 작전계획 수립에 이르기까지 북한국의 본질적 근원이었다.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下,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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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품제 하의 지방민

신라사회를 규정하는 원리는 골품제였다. 이에 따르면 골품에 따라 정치적‧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에 차등이 있었다. ...... 결국 정부의 중요 관부와 장관(令)이나 장군과 같은 군 지휘관은 진골만이 맡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골품제의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왕경인(王京人)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비록 평민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골품제에 편입된 사람들의 지위는 지방의 유력자보다 우월하였다. 물론 지방 지배를 위해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관등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왕경인에게 수여되는 경위(京位)와는 별도의 외위(外位)를 주었다. 7세기에 들어서는 경위가 수여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중앙정부에 진출하여 관리가 된 예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지방 유력자들은 골품을 지니지 못하였고 다만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을 뿐이다.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pp.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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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공인

"기독교인을 비롯한 모든 인민에 대하여, 누구든 마음대로 어떤 종교라도 선택하여 따를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다." (콘스탄티누스, 313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공인될 당시의 기독교는 흔히 알려진 바와는 달리 박해를 피해 지하에 숨어사는 몇몇 사람들이 믿던 종교가 아니라 전 로마 인구의 10% 이상을 신자로 거느린 종교로 성장해 있었다. 기독교 교회는 주교를 정점으로 사제 및 부제로 이루어진 계서제적 조직을 통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주교는 성직자와 주민의 동의를 받아 선출된 후 이웃 교구 주교의 축성을 받아 주교 자리에 올랐는데, 일단 주교가 되면 죽어 은퇴할 때까지 로마의 행정구역인 도서의 거의 일치하는 그의 교구 내에서 절대 군주와 다름없는 권한을 행사하였다. 그는 사제의 서품이나 세례 혹은 파문과 같은 종교적인 권한뿐 아니라 교구의 재정권 등 세속적인 권한까지도 행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단순히 전쟁에서의 승리에 대한 보답으로서가 아니라 기독교 교회가 가진 현실적 능력과 가능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

... 기독교 사제 집단은 제국의 통치 기구 및 관료 조직이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거나 축소되고 있을 때 비약적으로 팽창하였다. 따라서 4세기 말 이후 제국이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다시금 혼란고 위기에 빠지면서 통치 조직이 붕괴되고 서유럽에 게르만족 왕국이 들어서게 되었을 때, 기독교 교회와 주교가 로마인들의 대변자요 로마 문명의 수호자가 될 수 있었다.

(서양사강의, pp.1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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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시민권 정책

신분 투쟁 이후 약 1세기 반 동안 로마가 밖으로 눈부신 군사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정치적 욕구가 충족된 유산 시민층이 발휘한 유례없는 일체감과 애국심이었다. ...... 그러나 대외적 성공의 원천으로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이탈리아의 통일 과정에서 로마가 취했던 독특한 시민권 정책이었다. 독특했다는 것은 시민권에 대해 극히 배타적이었던 그리스 폴리스들과 달리, 로마는 개방적이고 탄력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로마는 정복 혹은 합병된 지역의 주민들에게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완전 시민, 준(準)시민, 동맹 시민 등 차등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시민단 자체를 확장함은 물론 시민단 밖에 중층적 외연 구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 외연 구조는 끊임없는 전쟁에의 부담을 안고 있던 로마에 두 가지 이점을 제공했다. 첫째, 강압적 지배에 뒤따랐을 긴장 관계 대신 오히려 종속 공동체들의 로마에의 구심적 경향이랄까 동화주의를 조성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 둘째, 로마에 인력의 증강이라는 군사적 이점을 제공했다. ...... 요컨데 이 시민권 정책은 인력 조달 및 지배의 부담을 수반하는 공동체의 확장과 도시 공동체의 배타적 본성 사이의 긴장을 조성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고안물이었다고 할 것이다.

(서양사강의, pp.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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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니 전쟁

이(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은 어찌 보면 그리스 세계와 오리엔트 세계의 대결의 연장이라는 흥미로운 일면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카르타고가 해상 교역 활동 및 알파벳의 발명으로 유명한 페니키아인들이 기원전 8~6세기에 지중해 서부 지역에 세운 식민지들의 맹주 격이었다면--그래서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가리켜 포에니(Poeni), 즉 페니키아인들이라고 불렀다--, 로마는 직‧간접적으로 그리스적 문화와 제도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해 온, 말하자면 그리스적 색체가 농후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대결(특히 3세기 말의 한니발 전쟁)에서의 승리로 로마는 갑자기 지중해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거의 필연적으로 동지중해의 헬레니즘 세계 강대국들과 일련의 긴장과 갈등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 즉 로마는 정치‧문화적으로 선진적인 헬레니즘 국가들에 대해 그동안 취해온 방어적 제국주의 내지 패권주의의 방침을 버리고, 보다 직접적인 지배로 전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로마의 지배를 직접적으로 관철시킨다는 것은 바로 그 국가들의 속령화를 의미했으며, 그 과정은 기원전 30년 로마가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마지막 남은 헬레니즘 세계의 강국 이집트를 속주로 편입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서양사강의, pp.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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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9일 화요일

프랑스의 절대왕권

프랑스 절대왕권이 특히 강력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기반은 무엇보다도 농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력에 있었다. 국왕은 지방 귀족이 농민을 지배하는 것을 막고, 그 대신에 타유(taille)세나 인두세를 농민에게 부과함으로써 농민의 잉여를 직접 빼앗았다. 프랑스 절대 군주들은 봉건영주를 궁정 귀족으로 만드는 한편, 관직 매매, 징세 청부, 공채 등의 방식을 이용하여 왕실의 재정을 확충했다. 절대 군주들은 이 과정에서 대(大)부르주아를 지배 체제의 일원으로 편입했으며 그와 함께 그들의 부를 국가로 끌어들였다. 이 때문에 적극적인 중상주의 정책이 시행되었음에도 부르주아의 부는 생산적인 자본 투자보다는 오히려 신분 상승과 낭비적 소비의 길로 나아가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서양사강의,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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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보수주의

(서양의 물질적 우위와 동양의 정신적 우위를 대비한 뒤 그 대안으로 동양정신을 강조한) 문화 보수주의는 인도와 중국을 중심으로 타고르와 간디, 량수밍 등에서 보듯 당시 아시아 각국에서 등장하여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새삼 확인해주면서 (반)식민지의 민족주의 정서에도 호응하는 기능을 담당했고, 최근에 '아시아적 가치론'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정신적 아시아론'은 앞서 살펴본 대로, 물질적 우위의 서양이란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고 그 전에는 오히려 동양이 물질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 당대 인도의 역사가인 사르카르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아시아인과 유럽인은 모두 물질적인 동시에 정신적이다. 둘 사이의 차이라고 주장되는 것은 산업혁명에 따라 인류의 일부가 놀라운 성공을 거둔 후 처음 이야기되기 시작했으며, ......" 19~20세기 서양의 물질적 위세에 눌리던 아시아인은 그 위기의 상황에서 만들어진 '물질적 서양론'이란 시각으로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하면서 정신적 위안의 도피처를 찾으려 한 것이다. ...... 결국 자기 오리엔탈리즘으로 연결되고 마는 이러한 문화 보수주의 역시 유럽 중심주의에서 진정으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역사교육과 역사인식, pp.36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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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주의의 문제점

서유럽을 축으로 한 세계 역사의 수렴적 발전 또는 통일성(unity)에 대한 대안은 다문화주의로 대변된다. ...... 이러한 다원주의적 관점에서는 문명의 개념을 국가-민족이 아닌 지역적 문화 단위로 정하고, 관점의 공평함과 균형을 추구한다. ......

그러나 '문화의 다양성' 담론은 저항의 언어로 유용해 보이지만, '문화의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경계'를 만들어내는 또 다른 패권주의적 정치성을 띠고 있다. 원래 '동양' 또는 '동아시아'의 동질성은 서구인들이 만든 허구인데, 이제 동양인들 스스로가 우월함으로 장식된 신비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합일, 상생의 힘으로서의 상극, 유기체적 우주관 등이 이 담론의 주요 내용이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동질적인 '하나'의 '유럽'이 존재한 적이 없는 것처럼 단일한 '동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 '동양' 또는 '동아시아'라는 개념은 '유럽'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지리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서구의 대안이 아니라 그 아류로 등장한 것이다.

(역사교육과 역사인식, pp.43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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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8일 월요일

스콜라철학과 보편논쟁

스콜라철학자들이 당면한 첫번째 문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었으며, 이 문제는 스콜라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는 문제에 관련된 것이었다. ...

이와 관련된 두번째 문제는 이른바 '普遍'(the universals)의 문제였다. 이는 12세기 초에 대두된 중요한 철학적 과제로서 보편적인 개념의 實在(real existence)를 주장하는 實在論(realism)과 보편적인 것은 오직 이름뿐이고 실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唯名論(nominalism)과의 대립을 불러일으키고, 양자간에 '普遍論爭'이 벌어졌다. 이 문제에 타당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은 에로이즈(Heloise)와의 사랑으로도 유명한 12세기 전반기의 파리학계의 거장이었던 아벨라르(Peter Abelard, 1079~1142)였다. 아벨라르는 보편적인 것은 실재하지만 그것에 내재하는 개별적인 것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개별적인 것과 별개로 파악된 보편적인 개념은 인간지성의 추상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14세기 초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서양사개론, pp.23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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