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후반이 되면 (당의) 율령律令통치가 동요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 단적인 표현이 바로 도호逃戶였다. 도호란 일반 민호가 국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이 타지역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무후대부터 현종대에 걸쳐 나타난 이러한 현상은 자연재해나 관리들의 폭정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토지의 겸병에 의한 소농민의 몰락과 유랑 혹은 과도한 부賦‧병역兵役의 편중 부담이 그 원인이었다.
이에 대해 국가에서 기존의 정책을 답습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었다. 따라서 객호客戶를 본적지로 송환시켜 호적에 재등재시키는 기존의 방식에서 객호의 존재를 인정하고 거주지의 호적에 등재토록 하는 등 정책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병농일치를 기반으로 한 부병제府兵制의 운용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결국 천보원년(742)에 변경에 10개의 번진藩鎭이란 군사 통치기구를 두었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절도사節度使를 두면서 점차 직업적인 모병제도가 일부 도입되었다. 이는 병제 전반이 부병제에서 모병제로 이행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모병제로의 전환은 당조에 재정의 부담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안겨 주었다. 부병제는 자비부담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당조가 군대를 유지하는 데에 별대른 재정부담이 없었지만, 모병제로 바뀌면서 병사의 의료와 식량 및 생활비까지 지급해야 하는 등 부담이 늘어났다. 여기에 이들을 거느리고 있던 절도사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 이 상황은 안록산安祿山이 등장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9년 동안 화북지역을 전란으로 몰아넣은 (안사의) 반란의 영향은 매우 지대했다. 우선 호구 수가 반란 전 890만 호에서 반란 직후에 290만 호로 격감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반란 전부터 궁핍하던 재정이 한층 더해졌다. 또 반란에 가담했던 절도사들이 거의 그대로 지역을 장악한 채 분권적인 행동을 취했다. 게다가 부병제는 완전히 무너져 모병제로 전환되었고, 균전제均田制와 조용조제租庸調制도 완전히 붕괴되었으므로 율령제 지배는 여기서 완전히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p.176-178)
댓글 없음:
댓글 쓰기